xoxo, text
 
 

 

I`m sor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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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준형과 어김없이 기분 좋게 하루를 보냈던 날, 이렇게 행복해도 좋을까 싶었던 그 과분함에 온 몸을 떨었던 그 날이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낯선 인영에 또 한 번 몸을 떨었다. 입을 다물고 경직된 자세로 곳곳이 서 있었고, 참으로 오랜만의 여자는 또 다른 작은 녀석과 함께였다.

아이가 있다는 건, 아버지에게 넌지시 말로만 들었었다. 이렇게 내 눈에 생경하게 볼 수 있을 줄 몰랐다. 여자의 다리 뒤에 숨어서 나를 훔쳐보고 있었다.

돈은, 방 책상에 놓아두었다며 여자는 그렇게 단 한마디만을 했다. 한 달에 한 번 생활비를 구실로 아버지와 만나곤 하는데, 언제나 넉넉해서 날짜가 조금 느려져도 그러려니 했었다. 아버지가 출장이란다. 그래서 애석하게, 여자가 왔다고 했다. 난 그러시냐고 말하면서도 그 꼬마에게서 단 한 번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 꼬마에게 달리 악감정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겁에 질린 듯한 녀석은 이윽고 울음을 터뜨렸고, 난 그 모를 불쾌한 감정에 잔뜩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여자는 곧 아이를 안았고, 집 안을 빠져나갔다. 뒤에서 현관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야 겨우 나는 현관에 긴장하고 섰던 몸을 움직일 수가 있었다.
으헉- 하고 남은 숨을 내뱉는데,
내가 이를 악물고 숨을 참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견디기가 너무 힘들었다. 여자를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그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게다가 그 아이는, 아버지와 다른 여자에게서 나온 것이 존재한다는 게 소름이 끼쳤다.




시간이 무의미하게 지나가고 집에 혼자 있으면 있을수록 집 안을 맴도는 아이 울음소리가 지워지지 않아 편의점에서 캔 맥주를 사와 들이켰다. 그게 몇 개 정도로는 되지 않았다. 그만큼 취하지도 않았고 불안하기는 매 한가지였다.

새벽 늦게까지도 도저히 잠이 오지 않고 심장박동이 빨라 전전긍긍하는데, 용준형을 불러볼까 싶었다가, 예전에 용준형이 찾아놓은 약이 생각났다. 용준형은 바보같이 꼬박꼬박 챙겨먹으라며 잔소리를 했었다. 그게 무슨 약인지도 모르면서.

몇 알이었더라. 꽤 오래 먹지를 않아서, 세 알이었던 가 다섯 알이었던가.
불안해서 그런지 더더욱 생각이 나지 않아 아무렇게나 약을 손에 떨어뜨렸다. 이상하게 정신은 말짱한데 몸이 술에 취했는지 약이 이래저래 부산스럽게 부엌바닥에 떨어졌다. 난 물 대신 술로 약을 삼켰다. 그러자, 아주 예전에 의사가 했던 말이 기억났다. 약을 먹을 때는 꼭 술을 감갈 것. 담배도 삼갈 것. 그래서 아차 싶었었다. 그러고도 고통 같은 게 멈추지 않아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준형아.

마음속으로, 이상하게, 항상, 녀석만을 불러보곤 했다.




그 날의 실수가 낳은 건, 무의식중의 진실이었을지 모른다. 나는 깨어나자마자, 무수한 것들을 적나라하게 후회했다. 누군가와 잔다는 건, 나에게 아무 것도 아니고 아무 일도 아닌 거였다. 처음에 옆 자리에 상대가 없음에 안도하고, 무엇보다, 용준형만 아니면 된다고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용준형과 잔다는 것은, 나에게서 ‘다른 남자’와는 개념자체가 달랐다.

내 여전한 무의식중에 라면 당연히 용준형보다야 윤두준이 먼저였을 거다. 그렇지만 깨어났고 벌거벗은 상태에서, 함께 잔 것이 윤두준이라고는 절대 생각도 안 했다. 윤두준은 오래 나와 사귀고 또 알았지만, 한 번도 몸을 섞은 적은 없었다. 그렇게, 난 용준형에게 거짓말을 했다. 윤두준에게 수많은 위로를 받는 척을 했지만. 윤두준과의 관계는 단 한 번도 친구이상을 넘어선 적이 없었다. 다만 내가 그걸 친구이상이라 생각하고 싶었던 것뿐이다.

진심으로, 용준형만은 아니길 바랐다.

“준형아, 나 물.”

그 와중에도 너무 놀랐던 건, 내 무의식이 이제는 윤두준이 아니라 용준형을 먼저 부르고 있다는 거였다. 윤두준보다 용준형이 어느새 먼저가 되어 있었다. 아니, 실은 언제나 윤두준보다는 용준형이 월등한 우위였다. 직접적으로 표출하지 못했던 것들이 적나라하게 나에게 돌아봐 생채기처럼 남았다. 입을 틀어막아보았다. 무수하게 참고 있었는데, 그럴 수 있다고 믿었던 것들이 송두리째 무너지고, 내 앞에는 물 한 컵과 옷가지를 챙겨 준 용준형이 있었다.

그렇게, 내가, 그랬다. 참 못할 짓을 용준형에게 했다. 자책감이 있었다. 내 무의식이 시험했던 용준형은 악마에 홀린 듯 수긍했을 것이고, 그렇게 나는 원나잇의 무수한 남자처럼 용준형을 대했을 거다. 그런 것들을 참으로 후회했다. 내가 너무 경솔했다. 모든 게 참으로 내 탓이었다.



고등학교 때, 유달리 한 주에 한 번은 윤두준이 날 용준형에게 맡기고 하교하던 때가 있었다. 항상 셋이다가 용준형과 단 둘이면 조금 어색하기도 했다. 그래도 뭐든 딱 정도껏 알려고 하는 용준형은 다 알고 싶어 하는 윤두준보다 나에게 충분한 위로감 같은 걸 주었다.

난 그 당시에도 울병과 함께 약을 복용하던 차라 잠이 불규칙하거나 아예 자지 못하거나 하는 부작용 따위 들에 시달려 힘들었었다. 습관적일 수도 있는데, 지하철을 기다리던 잠깐 쏟아지는 잠을 주체 못했다. 정말 웃겼던 것은 그렇게 잠이 들었다가 깼을 때 우리 집이면 그건 항상 윤두준이었고, 잠에서 깼을 때 여태껏 그 지하철 의자 그대로면 용준형이라는 거였다. 용준형은 그 놈의 시체병 어떻게 할 수 없는 거냐며 말은 그렇게 해도 참 따뜻했다. 그렇게 잠이 들 깬 상태로도 용준형과 나란히 지하철을 타고 집에 돌아오는 길 같은 게, 그런 게, 더 즐거웠다. 나는.



그런 용준형에게 지금의 내가 해코지 같은 것보다 더 심한 걸 한 거였다. 나는 극심한 죄책감이 있었다. 용준형과 특별한 것들을 한다는 건, 다른 남자들과 무언가를 하는 것과 너무도 달랐다. 그래서 나는 용준형과의 친구 이상은 엄두를 못 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차근차근 용준형의 진중한 마음을 깨닫고 모르는 척 할 수가 없을 때까지 진행되면서 여자들이 왜 용준형을 안달하는 지, 여자가 끊이지를 않는지 알 수 있었다. 용준형은 알던 대로 참 다정한 녀석이었다. 그런 게 참 고마웠다. 서서히 우울증 약을 끊을 수 있을 만큼이나 용준형의 따뜻함을 나는 꽤 많이 누렸다. 그만큼 두려웠다. 녀석을 잃으면 정말로 다신 일어서지 못할 만큼, 나락으로 떨어져 버릴까봐 나를 지켜내는 데에 급급했다. 그래서 내가 치를 떨 정도로 행복하다는 생각을 했었나보다.

그러면서도 난 용준형에게 모질었다. 맞닿은 감정을 부정하면서 상처를 자꾸 주면서도, 내가 적당한 따뜻함을 요구하면 그 정도보다 더 돌아와 주는 녀석의 관심에 안도하고 또 안도할 뿐이었다. 그거면 되었다고, 무던히 노력 중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내 욕심에는 용준형이 과분했다. 그런 녀석에게 난 모두를 다 주고 싶은 마음과 조금도 그러면 안 된다는 마음이 매일같이 싸워댔다. 전쟁 같은 고민을 할 때에도 난 이미 용준형을 다 가진 것인 줄은 그 땐 미처 알지를 못했다. 난 나의 값싼 오만함으로 내 달콤한 상상 속에 용준형을 몰아넣은 거였다. 용준형의 감정을 내 맘대로 유용하게 쓰고, 이용했다.




“책임질게.”

무서웠다. 정말로 용준형이라면, 책임이라는 단어의 뜻이나 정의보다 더한 것들을 나에게 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런 게 더 두려웠다.

“책임?”
무슨 책임.

모른 척 도피하고 싶었다. 심장은 정말로 미칠 듯이 뛰어서 터질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와중에도 나는 자꾸 이 상황을 외면하고 싶었다. 내가 용준형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나 같은 오점 같은 건 남기면 안 될 녀석이다.

“준형아, 미안한데.”

난 지금도, 잠은 아무하고나 잘 수 있어.

거짓말이다. 난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

혹시 그 때 일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
실은, 나 그 때 술을 너무 많이 했었나봐. 전혀 기억이 안 나서.

약기운 때문에 기억이 안 나는 건 확실히 맞았지만, 이런 식으로 용준형에게 상처를 주려고 의도적으로 말할 생각은 추호도 아니었다.

“없던 일로.”

하는 게 어때.

나는 용기를 내었다. 용준형에게 난 절대로 안 된다. 그렇게 녀석의 얼굴을 또렷이 바라보았을 때, 두 번째, 그렇게 나락으로 떨어진 것만 같은 표정을 보았다. 이번에는 처음보다 더욱 그랬다. 내가 녀석에게 처음 커밍아웃을 했을 때 저런 묘한 표정을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근데, 그 때보다도 내가 더욱 녀석 때문에 동요했다. 차라리, 날 때리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녀석이 절로 내 멱살을 잡을 듯이 내 옷깃을 부여잡았다. 옷깃을 잡은 손이 너무 떨려서 지금 터질 듯이 뒤는 내 심장소리가 그나마 들리지 않을 것에 안도했다. 될 대로 되라고, 눈을 질끈 감았는데, 녀석에게서는 너무나도 쓰라린, 입맞춤이 돌아왔다.

갑작스럽긴 했어도, 그에 응당한 화답을 걸 해주고 싶었고, 또한 그래서도 안 된다는 마음이 오만감정을 만들어 내자마자, 윤두준에게 발각되었을 때, 내가 그동안 용준형에게 정말로 그래서는 안 될 것들이 현실로 들이닥쳤다.

악-

용준형은 정말로 악, 소리를 내뱉을 정도로, 나는 녀석의 입술을 혀를 깨물어버렸다. 용준형에게 미안하지도 못했고, 어떤지도 상관없었다.

“두준아, 아니야.”

절대로.

나는 조금 웃었다. 절대로, 윤두준에게는 그러고 싶었다. 내가 윤두준에게 어떻게 비치든 그런 건 애초에도 상관없었다. 윤두준은 이미 나에 대한 모든 걸 다 알았다. 그렇지만 용준형은 나와 달랐다.
‘평범하지 않음.’
그런 것들이 얼마나 다른 시각과 시선을 만들어 내는 지 용준형은 그에 무지할 뿐이고, 난 그 현실에 순응할 뿐이다. 나는 절대로 용준형을 내 갇힌 세계에 끌어들일 수 없다.





_






극도의 긴장감과 불안감이 그 날 이후로 한 시도 날 떠나지 않고 최악의 기분이 곧 우울감을 가져왔다. 매일같이 용준형과 키스하고 윤두준에게 발각되는 꿈을 꿨다. 절대로 용준형에게 의지하지 말아야지 싶어도, 매일 불안하고 죽을 것 같은 울증에 떠는 몸을 웅크리고 그렇게 용준형을 불렀다. 처음 약을 먹기 시작했을 때에는, 새어머니가 될 여자에게 의도치 않게 커밍아웃하게 되고 그로인해 아버지께 이 사실을 아웃팅 당할까 노심초사했었다. 그런 불안감이 늘 날 떠나지를 않았었다. 처음 찾아온 울증의 강도부터가 너무 세어서 상처로 깊이 곪은 것들을 치유하는데 꽤 오랜 시간을 약으로 진정시켰었다.

지금은, 약으로도 진정시킬 수 없을 만큼, 내가 용준형을 많이 좋아하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용준형이 아니면 극도의 불안감도 우울도 완전하게 해소되지가 않는 게 문제였다. 녀석이 아니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내 세상이 정말로 움푹 꺼져 버리고 새까맣게 죽어 함몰된 것처럼 괴로웠다.

매일 울고 약을 먹었다. 학교는 자연스럽게 나가지 않게 되고 갑작스런 휴학 이후, 또 다시 나에게 남은 건 윤두준뿐이었다.

다시 통원치료를 하면서 약의 강도가 더 세어져 한 달이 넘게 고생을 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었을 때, 약을 먹고 괜찮아 질 수만 있다면 상관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몸은 몸이고 마음은 마음이라 다 다른 사정의 일이었다. 난 내 시야에 물같이 어른거리는 얼굴이 항상 윤두준이라는 걸 알았는데도, 입술은 항상 용준형을 내뱉었다. 그게 이미, 고쳐질 수가 없을 정도가 되어 버렸다. 침대에 하루 종일 누워있다 보면 꿀렁거리는 기억에 내가 전혀 기억하지 못했던 용준형이 기억나곤 했다. 그 새벽에 나에게 달려온 옅은 땀에 찬 그 녀석이, 나에게 얼마나 따뜻하고 편안한 것들을 선사했는지를. 그게 그냥 환상이나 환각이어도 상관없었다. 이것이 내가 넘볼 수도 없는 내 안의 용준형이다.




_





아주 오랜 꿈결을 돌아다니다가 문득 잠에서 깨었을 때, 나는 아주 가볍고 꽤 말짱할 만큼 몸이 가벼워져 있었다. 약을 먹었던 게 처음이 아니라서 인지, 두 번째 새 약에 거의 적응이 되었을 즈음의 첫 날인 것 같았다. 핸드폰의 달력을 제일 먼저 확인해보았다. 달의 수가 지나가 있었다.

집 안이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조용했고, 용준형은 이 와중에도 내 맘을 떠나질 않았다. 녀석을 기억하는 것만으로 조금 위안이 되는 것 같이, 난 그런 이상한 착각에도 빠져버렸다.

용준형과의 느긋한 추억을 돌아보다가, 문득, ‘형’을 기억해냈다. 그러고 보니, 그 날 묻고 싶은 게 참 많았었다. 형이 내 또래일 즈음, 나는 별 수 없는 고등학생이었었다. 형은, 곧 잘 나에게 형이 좋아했던 사람에 대한 고민을 듣곤 했었다. 형이 그 사람에 대해 이야기 할 때는, 꼭 다른 세상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이야기를 들을 때 나는 내가,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생각했더랬다.

형에게서 아주 예전에 받았던 번호이지만, 신호가 가고 상대방이 여보세요 하고 받았을 때 많이 안도했었다. 그래서 선뜻, 형, 저 기광이에요. 라고 말하기 전에 섣부른 진심 같은 게 토로되어졌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요.”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형.

만나달라고 말하기 전에, 형에게선 만날까, 하는 물음이 먼저 돌아왔고 나는 세차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너무 힘차게 끄덕이는 바람에 머리가 조금 울렸는데 그런 건 상관없었다.

가벼운 차림을 하고 나왔다가, 집에 다시 들어가 겨울 후드처럼 두터운 것으로 갈아입고 나오는 길이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왔던 우울병보다야 지금의 추위가 나에게 더욱 매서웠다. 형을 만나러 가는 길의 걸음이 참 부산스럽고 들떴었다.

그만큼이나 나는 형과 만나 아주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 자연스럽고 서투르게 용준형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몰랐는데, 용준형에 대한 감정을 이렇게 직설적이고 솔직하게 내뱉어 볼 수 있는 사람이 다행이도 있었다. 너무 좋다는 말 이상의 어떤 표현도 할 수 없을 만큼 나에게 충분하고도 남을 녀석이었다. 꼭 형이 나에게 그 사람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이런 느낌이 들지 않았을까 했다. 그래서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형과 그 사람에 대한 일을 물어보게 되었었다. 결과가 어떻든지 간에 내가 알고 싶었던 건, 관계에 관한 것들이었다. 부모님께 커밍아웃 하고 싶었고 그 사람과도 무수한 고민을 공유하던 그런 심오한 것들 말이다. 아직 내가 생각하지 못하는 부분들까지, 형이라면, 다 알려줄 것만 같았다.




집으로 가는 길에, 형의 차를 얻어 타면서, 확인한 핸드폰에는 언제 보냈는지도 모를 윤두준의 문자가 도착해있었다.

어디서뭘하든걱정되니까꼭연락해라

습관적으로 누른 통화버튼이었다. 그래도 내가 이제 약기운을 이겨내고 꽤 괜찮다는 걸 윤두준에게는 알리는 게 맞았다.

전화통화 후, 형이 넌지시 내가 말했던 그 용준형, 인거냐고 물었을 때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고도 영화관에서 만난 그 용준형에 대해 말했을 때, 형은 단번에 그 인상착의를 알았다. 정말로 기묘한 인연이다.



집 앞에 다다랐을 때, 집 앞에는 낯선 인영이 있었고, 난 당연히 윤두준이라 생각했다. 아까 통화를 하며 집에서 만나자고 했던 건 용준형이 아니라 분명히 윤두준이었다. 근데, 내 앞에 나타난 건 다름 아닌 용준형이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준형아, 왜 그래.”

녀석이 흥분해 있는 이유를 전혀 몰랐다. 그냥 녀석이 내 앞에 있는 것이 믿기지를 않아서 조금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 꼭 나처럼 녀석도 많이 수척해져 있는 상태였다. 안쓰러워서 그 얼굴을 어루만져 주고 싶었다.

“너. 저 남자-”

여자랑 애까지 있는 유부남을 넌, 너는.

용준형이 순식간에 형을 때려 땅에 널브러지고 멱살이 잡힌 뒤에야 이 현실이, 숨 가쁘게 오해가 되어 돌아왔다. 진심으로, 실망스런 눈이 돌아왔다. 숨이 막힐 정도로 외로운 찰나를 견디느라 나는 어금니까지 꽉 깨물어보았다. 온 몸에 힘이 바짝 들어 어깨가 다 떨렸다. 근데, 이렇게 참아내는 나보다 내 멱살을 움켜줜 용준형의 팔이 더 심하게 떨렸다.

용준형, 준형아.
…준형아.
……이건, 절대, 아니야. 네가 생각하는 그런.

용준형은 정말로 모든 걸 오해하고 도피하듯이 자리를 벗어나고 있었다. 녀석을 잡고 싶었지만, 잡을 수가 없었다. 목소리가 잦아지고, 마음이 잦아지고 나자, 나는 그 땅을 디딜 힘도 없어 그대로 주저앉아서, 한참을, 울었다. 아니다.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하고 주먹을 꽉 쥐어보았다. 그래도 눈물을 참을 수는 없었다.




그 날, 아무래도 잠이 오지 않아 약을 먹을까 했다. 작은 탁자 위에 하얀 약통과 핸드폰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윤두준에게 연락이 왔었다. 자신과 통화할 때, 용준형이 함께 있었고, 아마 나에게 올 듯 해보였다고, 그런 류의 통화였다. 나는 고개만을 가만히 주억이고 있었다. 지금 갈까? 묻는 윤두준에게는 정말로 괜찮다고 말하고 끊는 참이었다.

그 와중에 문이 세 번이나 잘못된 번호라는 소리를 내었다. 뭔가 싶어 현관으로 달려갔고, 다시, 내 앞에, 용준형이 나타났다.

“기광아, 아까는”

정말 미안했다 내가.

고개를 푹 숙이고 술 냄새를 폴폴 내며 선 용준형은 정확하지 않은 발음으로 두서없고 수도 없는 말을 꺼냈다. 술에 잔뜩 취한 눈이 날 자꾸 빗겨가고 들리는 말이라고는 기광아, 미안하다. 두 가지 정도뿐이었다.

“그렇게 미안할 필요 없어.”
…준형아.

입을 막아보았다. 울음 같은 게 잘 참아지지 않아서 큰일이었다. 꾸역꾸역 설움을 삼키고 다니 내 쪽으로 녀석의 몸이 떨어졌다. 떡이 될 정도로 마시고는 온통 정신없는 말을 내뱉는 녀석의 등을 그제야 한 번 안아보았다. 많이 말랐네, 준형아. 그러면서, 모든 게 토하듯 나왔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오해는, 절대 아니야. 정말로 아니야, 준형아.
녀석이 오늘의 내 말을 기억하지 않아도 좋다.

“형이, 아주 많이 힘들었다더라.”

그 사람을 좋아하는 것보다, 주위 사람을 설득한다는 게 너무 어려웠대.

녀석의 등을 그 옷깃을 꽉 부여잡아보았다.

“둘이 많이 싸웠대.”

마음은 안 그랬는데, 상황이 어려우니까, 오히려 서로에게 더 옭아매고 집착하고 그랬나봐.
……
결국 헤어지고.

아주 늦게, 뒤늦게 남자가 아닌 그의 부모님께 연락이 왔더랬다.

“자살이었대.”

정말로 좋아했던 한 사람을 장례식장에서 사진으로 다시 만났을 때, 형은… 형이.

오늘만큼은 용준형을, 으스러지게 안아보았다. 다음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나는 분명히 겁쟁이가 맞다. 그래서 겁이 많아 시작도 못 한 것들을 이미 접으려고 노력 중이었다.

어쨌든, 우리는 정말로 안 되려나보다. 그런 것들을 나는 새삼스레 수긍했다. 내 맘이란 걸 용준형에게 욕심내어서도 안 되었다. 최선을 다해 부정하려는 마음은 어떤 것으로도 후련하지 못했다.





_






용준형을 훈련소에 보냈고 그 한 달 새에 새까맣게 탄 녀석이 이삼일 집에 돌아왔다가 정말로 입대했다는 걸 윤두준을 통해 전해 들었다. 난 으음, 그렇구나 하고 건조한 추임새를 넣은 것뿐이었다. 윤두준은 고등학교 때처럼 어김없이 자주 우리 집에 들르고 제 집처럼 행동했다. 화장실에는 윤두준과 내 칫솔이 항상 나란히 꼽혀있고 어디 하나 윤두준의 손때가 타지 않은 게 없었다.
하긴, 나는 이 와중에도 윤두준이 용준형과 바뀌면 얼마나 좋을까 뭐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면 용준형을 내가 좋아하지 않았을지도,
그런 헛생각에 낄낄 웃었다가 말았다가,

그런 겨울을 보내고 있었다.

용준형을 보내고 나니 완연한 겨울이 찾아왔다. 나에게 용준형이 없는 첫 겨울은 정말 너무나도 추웠다. 보기 드문 한파라고 떠들긴 했지만, 나에게는 정말로 날카로운 겨울이었다.



이듬해 봄이 될 즈음 나는 복학을 하고 새내기 들과 벚꽃 따위를 감상하며 심심한 캠퍼스 생활을 했다. 한학기가 더 빠르게 지나가는 윤두준은 날 챙길 수 없을 정도로 바빴다. 당연했다. 매해 과대를 맡고 학교에 아는 사람도 많아 학생회장 출마에도 손색이 없을 녀석이 되어 있었다. 그래도 전화나 문자를 하루에 한 번은 빠지지 않고 했다. 나는 그 연락에 듬성듬성 성의를 보이기도 했다.

신기하게도, 외롬을 타는 버릇이 많이 없어진 것 같았다. 집에 덩그러니 혼자 있다 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그 횡함이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는지, 도서관에 혼자 앉아 있어도, 집에 식탁에 혼자 있어도 아무렇지가 않았다.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용준형과 함께 갔었던 영화관이나 DVD방을 가고, DVD방에 갈 때에는 항상 용준형과 봤던 노트북을 눈물 없이 보곤 했다.

그보다 자주 쿨피스를 사 들고 냄비우동이 맛있는 포장마차에 찾아가기도 했다. 포차의 이모와도 많이 친해졌는데, 이모는 내가 올 때마다 항상 앉던 자리의 손님들에게 양해를 대신 구해주고 자주 용준형에 대한 안부를 물었다. 이모는 대개 용준형에 대해 표현 할 때는, 허옇고 큰 놈 같은 거였고 나에게는 작고 예쁜 놈 정도로 분류했다. 그런 용준형이 날 버리고 군대를 갔다는 소식에 이모는 혀까지 차며 흉보듯 이야기 하곤 했다.

포차를 나와 집으로 가는 길에, 지하철 역 가까이 커피 전문점에 들어가 용준형이 좋아하던 아이스 라떼를 주문하기도 했다. 집으로 가는 오르막길에 그 맛없는 커피를 먹으며 잔뜩 인상을 쓰고 그러면, 용준형이 꼭 내 옆에 있는 것처럼 들뜨고 재미있었다. 커피라는 건 정말로 맛없었지만. 그래도 난 여전히 그 거리를 지날 때마다 커피를 사고 시럽을 왕창 넣어 마시곤 했다.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다 보면 윤두준에게는 그런 연락이 왔다.

준형이 외박 나왔어.
준형이 휴가 나왔어.
…둘이 볼 생각은 있는 거냐.

얼굴 볼 생각이 도대체 있는 거냐고 묻는 윤두준은 틀렸다. 난 정말로 용준형이 보고 싶어 미치겠다. 내가, 이미 그런 생활을 하고 있다.





_






바쁜 학교생활을 했다. 학기 중에는 과제와 팀플에 치이고 방학에는 생각도 안 했던 과외까지 만들어 정신없이 보내게 되었다. 윤두준에게는 항상 챙김 받았지만, 예전처럼 의지하려는 마음 같은 건 눈곱만큼도 아니었다. 그냥 이제 윤두준에게는 의무적인 것들이 있었다. 그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런 와중에도 이따금 통원치료를 받고, 약을 많이 줄였다. 나는 이제 아주 깊은 새벽에 용준형에 대한 꿈같은 걸 꾸지 않는다면, 더 이상 약을 먹거나 해서 그 상황을 모면하려는 일은 없었다. 새벽에 날 깨우는 용준형은 아주 다양했다. 술에 잔뜩 취한 고주망태 같은 모습이기도 했고,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얼굴이 시뻘개지고 꼭 나를 때릴 것만 같은 얼굴을 하다가도 완연한 실망감이 드러나는 표정이기도 했다. 다 내가 보았던 그런 소소한 얼굴들이었다.

학교를 오갈 때마다 용준형과 비슷한 스타일의 사람을 보면 눈을 땔 수가 없이 그립기도 하고, 환청 들리듯 퉁명스런 녀석의 억양이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것처럼 신기한 나날을 보내기도 했다. 게다가 핸드폰 안에는 보고 싶다고 말하고 있는 용준형의 문자가 보관함에 허다하게 많았다. 이제, 집 안 곳곳에는 용준형이 땀을 뻘뻘흘리며 청소하는 모습도 있었고, 어수룩하게 설거지를 하는 모양과 음식물 쓰레기를 치워주는 일까지 모든 걸 무릅쓴 녀석이 있었다.

그러니까, 아주 잠시도, 용준형은 날 떠나있는 적이 없었다.

내가 생각하는 그 만큼은 꼭 내게 있었다. 내가 녀석에게 기대했던 것들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이 돌아왔던 것처럼, 용준형은 나에게 지금도 그랬다. 내 마음의 절반이상이 다 녀석에게 동이나 있는 것처럼 아주 허하고, 충분하게 속으로나마 용준형을 누리곤 했다. 그 용준형은 내 외롬을 송두리째 앗아가 버리기에 충분했다.




찬합 가득이 반찬을 싸들고 온 윤두준이 냉장고를 정리하고 있는 뒷모습을, 나는 멍청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기광아.”

이 와중에도 난 왜 저 뒷모습이 용준형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바보 같았다.

“준형이 곧 휴가 나온대.”
“또?”

물으면서 시간을 가늠해 보았는데, 오 마이 갓. 녀석이 군대에 가 있던 시간이 벌써 1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세상에나. 녀석을 지우는데 2년을 다 허비했어야 하는데, 난 고작 1년 동안 녀석을 그리는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남은 1년 안에 녀석을 지우기에는 너무 시간이 촉박하다. 아직도 마음에 고여 있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아직 녀석과의 마지막, 함께 국밥을 먹었던 날, 용준형이 내 앞에서 서럽게 우는 데까지는 너무나 오랜 시간을 더듬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같이 가자.”
“…….”

선뜻 대답을 못 하고 우물대었다. 그 사이, 짧게 한숨 같은 게 나왔다.

“같이 가자.”
“두준아.”

냉장고 문을 닫고 쭈그리고 앉은 몸의 윤두준이 식탁의자에 앉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누나 잊을 때, 얼마나 걸린 것 같아?”

윤두준은 그런 건 아주 자연스럽게 잊히는 것 같다고 혼잣말처럼 했다. 그건 정확히 맞는 말이었다. 잊는 시간을 시작 땡. 으로 마무리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정말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

내가 남자를 좋아하는 게, 네겐 어떤 의미야?

윤두준이 어디까지를 용납할 수가 있는 것인지가 참 불안했다. 아니, 한시도 빼놓지 않고 날 물음표처럼 만들기도 한 부분이었다. 나는 윤두준의 도가 지나친 친절에 날 좋아해주는 거라고 착각하고 싶을 만큼 절실했던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윤두준은 나에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고 항상 그 정도였다.

“솔직히 예전에는.”

네가 남자가 좋다고 했을 때, 확실히 무슨 의미인지 몰랐어. 별로 그런 개념자체도 없었고.
나도 윤두준도 서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도 잘 몰라.”

근데…

윤두준은 조금 웃었다.

“준형이 보면, 알 것도 같아.”

그런 얘기 하더라. 군대에는 시꺼먼 개구리 같은 놈이 무지 많은데, 그 무수한 사내놈들 중에 전혀 제 마음을 설레게 하거나 묘한 느낌을 주게 하는 놈이 없대. 이 세상에 여자들이 아주 많은데, 내가 여자를 좋아한다고 해서 모든 여자가 다 좋은 건 아닌 것처럼, 그런 게 아주 비슷하다고 하더라. 무수한 여자들 중에 단 한 명이 자신의 마음을 가져가는 것과, 무수한 남자들 중에 정말 딱 그 놈 밖에 안 되겠다 싶은 거.

지나치게 솔직하고 담백한 말들이다. 술자리에 앉아 윤두준과 용준형이 그런 식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을 것을 그려보았다. 실은, 전혀 가늠이 되질 않았지만, 어쨌든 내 머릿속의 용준형은 짧은 군바리 머리도 아닌 게, 참 멋스러웠다.

“녀석 말에 의하면.”

널 적당히 안 보면 잊힐까 싶어서 입대 결정을 하긴 했는데, 들어가고 보니까, 정말 너 아니면 내가 안 되는 구나, 그런 걸 느끼고 있대.

윤두준은 크게 으쓱해보였다. 나는 그 사이에 어깨까지 들썩이며 한참을 웃고 있었다.
그 때 윤두준은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우냐, 기광아.”

아니. 내가 울기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는데,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을 내뱉으려 억지로 입을 여니, 울음부터가 쏟아졌다. 정말 용준형은 끝까지 나를 못된 녀석으로 만들고 있다. 그런 녀석이 여전히, 나도, 너무 좋아 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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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용준형도 끝까지, 서로 얼굴을 보지 않았다. 무수한 그리움에 휩싸여 있으면서도 잠깐 만나는 찰라가 있을까 전전긍긍했다. 어떤 식으로 무슨 표정과 말을 하며 봐야 할지 전혀 가늠이 되지 않아서 피하고 싶은 마음이 강했기 때문일 수 있었다. 그리움에 너무 충실했을 수도 있고, 그런 계절이었다.

익숙하게 그리던 추억들의 막바지에는 또한 아주 비슷한 계절 속에 들어가 있었다. 내 꿈의 용준형은 서럽게 울던 그 때에 멈춰있었다. 잔뜩 움츠린 어깨가 힘없이 들썩이면서 울음을 끝까지 참으려던 녀석을 바라보던 내가 잠에서 깨면 나는 그보다도 서럽고 건조한 눈물을 한참이나 더 흘리고 있었다.

그렇게 추운 계절이 다가오고, 용준형이 이미 1년을 훌쩍 넘은 군 생활을 할 때 즈음이었다. 꽤 추운 계절에 고지서 같은 게 도착하듯 영수증들 사이에 이름 없는 편지가 도착해있었다. 집에 들어와 고지서를 열어보듯 봉투를 아무렇게나 뜯어내고 안의 꼬깃꼬깃한 편지와 사진을 들춰보았다. 그 안에는 인물 없는 풍경 사진 몇 장과 단 한 장의 편지 같은 게 들어있었다.

날이 상당히 춥더라. 물론 거기보다야 여기가 더 춥겠다만.

편지는 겨우 반장 정도만 채워져 있었다. 봉투에도, 편지 안에도 보내는 이가 적혀있질 않았다.

나인 걸 알면 편지조차 열어보지 않을까봐 두려워서 차마 내 이름을 봉투에 적지 못했다. 미안하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녀석인 걸 알았으면, 물론, 이걸 어떻게 하면 흠 없이 잘 열어볼 수 있을까를 고민했을 거다.

여긴 겨울에 눈이 많이 오고, 하루의 해가 뜨는 게 가장 가까이 보이는 곳이라고 한다. 난 질리도록 본 것들을 사진에 담으려니, 그 신비로움이 좀 덜해서 네가 이 사진들을 보고 별 감흥이 없을 지도 모르겠다.
따뜻한 말이라고는 단 하나가 없는 건조한 문체였다. 정말, 행동과 말투가 천지차이가 날 만큼 다른 녀석이다.

나는 이런 것들을 매일 보고 있다. 일 년을 내내 보고 났더니 이제 그러려니 한다. 해가 뜨면 뜨는 구나, 그런 시간적인 의미만을 부여할 뿐이다. 피곤하다.

졸린 눈 비비며 피곤함에 절어 이런 걸 적고 있을 용준형이 너무 우스웠는데, 조금도 웃음이 나질 않았다.

네 생각을 하곤 한다. 너랑 이런 장관을 같이 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실은, 이런 장관보다야 매일매일 네가 보고 싶다.

보고 싶다 말하는, 수려하지도 못한 녀석의 글씨를 한참이나 문질러 보았다.

두준이 통해 네 소식은 이따금 듣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되었다. 일 년이라는 말미가 있으니, 절대로 널 잊고 제대할 생각이다. 그 땐 정말로 좋은 친구가 되어보자.

……

친구가 되자는 건 거짓말이다. 나도, 용준형도 거짓말을 하고 있다.

그래도 여전히 지금은, 네가 보고 싶다. 이기광.

편지의 끄트머리가 다 잘린 것처럼 편지는 여운이 긴 끝이었다. 잘 지내냐는 인사말 하나가 없는 걸 보니, 무엇을 물어보고 싶고 또 답장을 원하는 편지는 아니었다. 근데도 난 답장이 너무 쓰고 싶었다. 그렇지만 봉투에는 용준형의 부대 따위 적혀 있지 않았다. 아마도, 윤두준에게 물어보면 쉽게 돌아올 것 같았지만, 내가 혹여 무언가 보냈을 때, 녀석이 더 괴롭거나 힘들까봐 그럴 마음도 쉽게 접었다.
내가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다.
나는 수도 없이 녀석이 보낸 사진을 돌려보았다. 눈이 너무 많이 와서 풍경이라고는 잘 보이지도 않는 사진도 있었고, 해가 뜨는 장관은 보고만 있어도 입이 쩍 벌어졌다.

나는 침대 맡에 당장 사진들을 붙여놓고 드러누웠다. 용준형이 있는 곳을 내가 훔쳐본 것처럼, 꿈에서라도 그 곳에 가 볼 요량이었다. 그렇게 억지로 잠을 청하는 데, 잠이 쏟아지기는커녕 눈물이 쏟아졌다.

보고 싶다, 준형아.

나야말로, 간절하게 하고 싶은 말이었다.




새벽 세 시였고, 칼바람이 몰아치는 그 새벽에까지 잠이 오지 않아 맨발에 슬리퍼를 끌고 오들오들 떨며 24시 편의점에 들어갔다. 두준이가 자려나. 그랬는데도 두준아, 자? 하고 문자를 하면 곧 전화가 왔다. 내가 잠깐 나올래? 물으면 한 달음에 편의점까지 달려오는 놈이, 윤두준이었다. 졸음이 가득한 눈을 하고도 이제 막 자려는 참이었다고 으레 배려하는 녀석에게 난 모른 척 빙글 웃었다.

“잠이 안 와?”
“어.”
“약은 먹었고?”

아니.

나는 캔 맥주 두 개를 사 윤두준에게 하나 들려주었다. 그러고 보니, 약을 먹으면서, 술을 전혀 마시지 않았었다. 꽤 오랜 시간 그렇게 지내왔었다. 술이 없는 만큼, 용준형도 내 인생에 결여되어 있었다.

“왜 이렇게 춥게 입었어.”
“이렇게 추운지 몰랐어.”

윤두준은 어울리지 않게, 항상 나에게 아줌마 잔소리 같은 걸 했다.

맥주 한 캔을 금방도 비운 우리는 네 시가 되어서 더 어둑어둑해졌을 즈음에야 편의점을 나섰다. 여전한 칼바람에 단단하게도 입고 나온 녀석이 제 패딩 점퍼를 나에게 씌우듯 입혔다. 됐다고 한사코 거절을 하는 데도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아주 조용하게 우리는 길을 올랐다. 올라가는 길에 깜깜하게 닫힌 국밥집이 보였다. 윤두준과 자주 가던 곳이었는데, 윤두준보다야 용준형이 먼저 기억이 났다. 그래서 난 더 걷지 않고 하염없이 그 자리에 서 있다가, 풀썩 주저앉았다. 윤두준은 정말 놀란 얼굴로 내게 다가와 앉았다.

“왜 그래.”
“취했나봐.”

오랜만에 술을 마셔서 그런가.

그런, 거짓말 같은 걸 했다. 윤두준은 그래도 다행이라는 듯, 안심하는 얼굴을 했다.

“야, 업혀라.”

불안해서 안 되겠다.

윤두준은 제 등짝을 내보였다. 나는 그 등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데려다줘.”

문득 맹한 내 말에 윤두준은 잠깐 날 돌아보았다.

“그래, 데려다 줄게.”

얼른 업혀. 춥다. 빨리 가자.

너무 추워서 그런가 콧물이 나올 것 같아서 코를 몇 번 훌쩍 거렸는데, 쓸데없는 눈물이 났다.

데려다주라.

다시 한 번 말했을 때, 윤두준은 알겠다고 얼른 업히라고 보챘다. 아니다. 난 지금, 집에 가고 싶은 게 아니라, 용준형에게 가고 싶다. 지금 윤두준이 날 용준형에게 데려다주었으면 좋겠다.

콧물을 잔뜩 삼키고 엎어지듯 윤두준에게 업혔다.

내가 절대로 못 잊을 용준형이 정말로 제대할 즈음 나를 다 잊으면 어쩌나 불안하다. 편지를 마지막으로 용준형이 더 이상 나를 보고 싶어 하지 않을까봐 두렵다. 내가 아무것도 말하지 못한 진실을, 용준형이 다 알지 못하는 게 서럽다. 이제는, 다 말해주고 싶다. 어렵고 힘들고 두렵고 슬픈 게 뭔지 다 알려주고 싶다. 그래서 다 털어버리고 싶다. 그런 부정적인 것들 다 털어내고 용준형만 내게 남아도 난 여한이 없을 것 같다. 초라하게 벌거벗은 나 그대로도 용준형이 다 이해해 줄 것 같다.

제발, 나에게 돌아 와주라. 준형아.
나를 잊지 말아줘.

절박한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fin. 20110422-20110429

행복해 질 수 있을까, 기광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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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써도 읽으실지 모르겠지만 정말 잘 읽었습니다. 쉬지 않고 처음부터 읽어내려갔어요. 보는 내내 조금은 설레고 또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다 읽고 글 속의 현실이 진짜 세상처럼 느껴져서 추스리느라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글을 남겨봅니다. 정말 좋은 글 감사합니다. 아주아주 오랫동안 생각나는 글이 될 것 같아요. 마음을 전하고 싶은데 다 표현하지 못하겠네요ㅠㅠ 부디 글 속의 아이들이 행복하길 바랍니다. 작가님도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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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전의 글이 2018년의 저에게 묵직하게 다가오네요. 밤을 새어가며 글을 읽은건 정말 오래간만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윗분 말씀처럼, 작가님이 행복하시길 빌어요. 제가 상상하는 이 글 이후의 아이들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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