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oxo, text
 
 

 

I`m sorry:)

 


 |  ♥ (4)  HYUNGKWANG (30)  DUKWANG (1)  SEOBKWANG (1)  TRIPLE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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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잠에서 깨었는데, 허연 몸뚱이에 아무것도 걸쳐져 있지 않다는 것에 소스라치듯 놀라 침대를 내려오자마자, 어제 방바닥에 널브러진 옷들을 주워 입었다. 어차피 차려입고 온 옷이라고는 속옷에 민소매 그리고 트렁크 같은 잠옷바지 하나뿐이었다.

옷을 부랴부랴 입어내자마자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돌이켜 생각지 않아도 주마등처럼 지나가던 사건 사건들에 온몸이 뻘게지듯 창피해졌다. 그러니까, 어제, 이기광과 나는. 문득 내가 내려온 침대를 향해 눈을 돌렸을 때, 깊은 잠에 곯아떨어진 이기광이 보였다. 내가 침대에서 내려올 때랑 같은 똑같은 나신이었다.
그거였다.
나는 어제 이기광과 잤다.

말 못할 당혹스러움과 형용할 수 없는 정복욕이 동시에 만족해서 말 그대로 정말 어쩔 줄을 모르고 한참이나 방을 멋대로 쏘다녔다. 그러다가, 문득 잠든 이기광의 얼굴로 가까이 다가갔다. 시꺼멓고 긴 속눈썹을 보다가 검지로 쓸어볼까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가져다 대려는데 마음보다 더 떨리는 고 놈의 손가락이 내 말을 안 들어서 그만둬 버렸다.
그 대신 이기광의 숨을 쉬고 있는지, 얼굴에 가슴에 귀를 대어보았다. 쌕쌕이는 아주 조용하고 고요한 소리를 동반한 약간의 술 냄새가 났다.
신기한 마음에 웃음이 다 났다. 입을 막고 아무리 노력을 해도 으흥흥, 하고 새는 웃음을 견뎌낼 수가 없이 붕 떠 있었다. 그러다 녀석이 눈썹을 조금 꿈틀 했을 때, 헙, 하고 숨까지 참아버렸다. 깨면 뭐라 말해야 할지도 아직 생각 못했다.



그제야 좀 정신이 들어서, 거실을 나와 보았다. 거실에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쳐져 있는 맥주 캔이 여섯이나 되었다. 반도 채 다 마시지 못한 소주는 뚜껑이 없는 채로 고스란히 방바닥에 서 있었다. 어제, 나와 헤어지고 나서 짧은 그 저녁에 이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생각해보다가 도저히 가늠을 못하겠어서 그냥 신발장 앞 분리수거 바구니에 캔을 던져 넣고 소주는 싱크대에 부어버렸다. 꿀렁꿀렁하고 이상한 소리를 내며 남은 소주가 한참을 싱크대 하수구로 빨려 들어갔다.
그러고 보니 싱크대도 엉망이었다.  그래도 곧 잘 챙겨먹고 있는지 큰 비타민제 약품의 뚜껑이 열려져 있고 그 약의 일부가 토사물처럼 아무렇게나 싱크대와 그 바닥에 흩뿌려져 있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싶었다.

“준형아, 나 물.”

까치집을 여러 개 세운 머리를 잔뜩 감아쥐고 나온 이기광은 여전한 나신을 하고 있었다. 아침에 보니 어제 밤의 기억보다 더 아찔해서 난 녀석에게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도, 눈을 마주치지도 못했다. 물이 어디 있더라, 냉장고 문을 열어야 하는데 생각 없이 괜한 찬장을 뒤졌다.

식탁에 앉아 물을 호로록 마시고 있는 녀석에게 옷가지를 대충 가져와, 옷, 입을까? 하고 멍청하게 말하자, 그제야 이기광은 제가 아무것도 안 입은 줄을 깨달았는지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우리는 그 동안 아무 말이 없었고, 식탁을 방패삼아 딱 그만한 거리를 두고 앉아있었다. 이기광이 물이 바닥날 때까지 천천히 마시는 동안 난 몇 차례나 별 수 없는 헛기침을 했다. 이거, 너무 어색해서 견딜 수가 없다.

“아프다.”

물을 다 마신 이기광은 몸을 잔뜩 웅크리고 앉아서 잔뜩 미간을 찌푸렸다. 난 그제야 흘긋 이기광을 훔쳐보듯 짧게 쳐다보았다. 몇 번이나 스친 눈동자를 겨우 쳐다보자, 이기광은 웅크린 고대로 날 보며 비죽 웃었다. 난 혼자 괜한 긴장을 타고 마른 침을 몇 번이나 삼켰다.

“버릇 있나 봐, 너.”

여기서 이기광이 말하는 너는 분명 나일테다.

“섹스할 때.”

마른 침을 또 한 번 꿀꺽 삼키려다, 사래 들린 듯 웩웩대며 기침을 했다. 그 여파로 목 뒤까지 화끈거렸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내가 얼마나 추해져 있을지 알 만 했다. 최악이다. 어쨌든, 어떤 단어이든지 간에 이기광에게서 나오는 단어는 날 당혹시키는 편이다. 내가 겉핥기식으로 알았던 그저 평범하고 착실한 이기광은 확실한, 오류와 같다.

“너 가슴만지는 버릇 있나봐.”

남자는 여자랑 다르게 가슴이 있는 게 아니라서 그런가, 계속 욱신거려.

날 놀리려는 속셈인가, 날 무안하게 할 참인가, 이기광은 정말 모를 의도를 했다. 아무 거리낌 없이 웃는 얼굴을 하고 눈가는 잘게 휘어 있었다. 그리고는 그제야 내가 그런 버릇이 있던가 생각해보았다. 하긴, 이기광이 아니면 남자와 잘 일이 뭐가 있겠으며, 심지어 첫 남자라니. 나에게 첫 남자가 이기광이라니. 그런 것도 믿기질 않아서 볼을 몇 번이나 꼬집어보았다. 분명 이게 꿈은 아닐 테다.



괜찮은 거냐고, 아픈 데가 어디냐고, 약을 사다 주겠다고 할 수도 없었다.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를 몰라서도 그렇지만, 옆에 앞에 이렇게 가까이 녀석을 두고도 한참을 우물쭈물했다. 내가 이 상황을 너무 어려워해서 상대적으로 그렇게 보이는 건 지 몰라도 이기광은 도리어 가벼운 투였다.
난 이것조차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떻든지 간에 결국 우리는 사고를 친 거고 으레 당한 쪽에서 책임을 물어온다거나 아니면 이왕 이렇게 된 거 해피엔딩인 쪽이 맞는 게 아닌가, 우리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 어떠한 관계를 다시 정립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던 나에게 뒤통수를 치듯이 전혀 다른 이기광의 반응이 나타났다.

그런 이기광을 두고 조금 더 진지해보자 하면 내가 너무 오버하는 게 아닐까,
도리어 걱정스러워지고, 또한 초조해졌다.

자주 화장실을 들락거리던 이기광은 구부정한 몸을 하고 아주 불편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우리 어제 안에 다 했던 가.
무엇을 어디 안에, 핵심어가 많이 빠진 질문 안에 나는 그저 멍한 듯 녀석을 바라볼 뿐이다.

화장실에 다녀오면 다소 지친 얼굴을 하는 이기광은 맥없이 거실에 덩그러니 앉은 내 무릎을 베고 누웠다. 나는 눈을 감은 이기광의 얼굴을 내려 보다가 조심스레 앞머리를 손끝으로 정리해 주었다.

“어제 무슨 일 있었어?”

어제, 정말로 묻고 싶었던 질문을 이제야 했다. 어제 분명 이기광이 현관부터 나에게 맹목적으로 달려들지 않았다면, 오늘 내가 녀석과 다른 상황에 마주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렇지만 내가 어제 녀석과 잔 것에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상황은 나를 승산 있는 게임으로 몰아간다. 이기광은 어제 있었던 일이 ‘전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 일도 없었어?”

이번엔 고개를 긍정하듯 주억였다. 아무 일도 없었는데, 지금 이기광과 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해답이 없는 질문이 끊임없이 들었지만, 더 이상 녀석을 추궁하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당장 몸이 어딘가 불편한 듯 구겨진 녀석의 얼굴을 펴주고 싶은 게 먼저였다.

나는 용기를 내어 녀석의 마른 뱃가죽에 손을 얹었다. 그 순간, 녀석이 눈을 번쩍 떴다. 나는 녀석의 뱃가죽에 올린 손을 오른쪽으로 동그라미를 그리고 문질렀다.

“엄마 손은 약손. 해줄게.”

그제야 녀석이 동그랗고 크게 올려다보던 눈을 흩뜨렸다.

“배 아픈 거지.”
“어. 너 때문에.”

그래. 나 때문에.

이기광이, 뭐든, 나 때문이라면 그게 맞는 거다. 무엇 때문인지도 모르고 녀석에게만은 그저 고개를 수도 없이 주억거렸다.

“간지러워.”

간지러워, 준형아.

배를 만져주던 내 손에 제 손을 올려놓던 녀석은 조금 누그러진 얼굴로 또 곧 색색대며 편안한 수면 속으로 빠져들었다. 가지런하던 그 속눈썹을 또 몇 번이나 내려다보았다. 녀석이 꾸고 있을 그 꿈에조차 같이 달려들고 싶다.

어제 새벽의 이기광은 나에게 이제까지의 모습과 전혀 다른 얼굴을 했다. 꿈에서도 그렇게 달콤할 수가 없이 굴었고, 난 그래서 이게 꿈이라도 여한이 없겠다 싶었다. 간지럽고 서로 다른 온도의 몸이 서로의 열기와 분위기에 취해서 이성으로도 제어할 수 없는 상황이 분명히 있다는 걸 이기광을 통해 또한 배웠다. 새로운 걸 알려주고 또한 그걸 알아갈수록 녀석이 너무 애가 탈 정도로 깊다. 내가 예전과는 몰라보게 다른 모습으로, 누군가를, 이기광을 좋아하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이 또한 꿈결인가 싶다.




_





요즘 사회가 아무리 상식 밖의 일이 많이 일어난다고 해도 사람이 사람과 밤을 보냈다면, 대개는 어쩔 수 없이 라도 그 관계가 좋은 쪽으로 순응되어지기 마련이다. 난 윤두준에게 전화라도 해서 묻고 싶었다.

나 일전에 이기광과 이러이러한 일이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하면 좋으냐.
이기광과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냐.

라는 것보다도, 윤두준에게 따지고 싶었다.

이기광은 왜 그런 날이 있었던 것이 별 일 아니라는 듯이 굴고 있는 거냐.
뭘 모른 척 하고 싶은 거냐.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도대체 왜 나에게 아무렇지 않게 굴 수 있는 거냐.
이건 여자와 남자의 관계가 아니라, 순전히 남자와 남자의 관계이기 때문인 거냐,

…그런 거냐고 윤두준은 또한 다른 비책이 있을까 싶었다.

정말로 이기광은 마치 우리가 보낸 그 날 밤이 이 세상에 없었던 날 같이 굴었다. 난 그 사이에 무수한 생각을 했다. 꼭 이기광과 그저 원나잇 상대정도로 치부되어진 게 아닐까 뜻 모를 조바심마저 들었다. 최상의 시나리오부터 최악의 시나리오까지 머릿속에 그득그득 들어찼는데 꼭 좋지 않은 결말들만 더 선명하게 남았다.
진짜 최악이다.

좀처럼 정리되지 않는 관계정립에 부산스러워 윤두준과 몇 번 자릴 피하고 이기광과 몇 번 자리를 피한지 며칠이 안 되어서도 금방 윤두준에게서 적극적인 술자리 요청 같은 게 돌아왔다. 내게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하다는 확고한 의지가 있는 모양새였다. 정말 오지랖만큼이나 눈치하나는 백단인 녀석이다.

나와라, 나와라, 제발 좀 나와라.

통 사정을 하는 윤두준은 이미 좀 기분 좋게 취해있는 상태였다. 신발을 다른 걸 신을 걸 그랬나. 조금 더러운 바닥사정에 이제나저제나 아껴 신는 운동화가 더러워질까 봐도 좀 정신을 팔아보았다. 그렇게 주위가 너무 시끄러워 눈살을 찌푸리며 겨우겨우 셋이 잘 가는 술집에 안착했는데, 정말 다행스럽게도 이기광이 없었다.

“왔냐.”
“그래, 이 새끼야.”

안도와 짜증이 불시에 나왔다. 내가 욕을 퍼붓고 싶은 상대는 사실 이기광이었다. 그게 맞았다. 근데 나는 그 조그마한 사내놈 하나를 어떻게 못해서 이렇게 전전긍긍이었다. 볼 성 사납다. 젠장할.

“한잔 해.”
“맥주 할 게.”

소주 해 소주. 맥주는 무슨.

작은 잔부터 들이대는 윤두준은 영락없는 회식자리의 아저씨처럼 굴었다. 난 못마땅하긴 했어도 그동안 여간 속을 태운 게 아니라서 마른 목을 더 마르게 하는 소주로 목을 축였다.

“기광인 어디 갔냐.”
“…이기광이 있어?”

어어. 분명 여기 있었는데-

화장실 갔나. 하는 윤두준의 옆에 쓰러질듯 아슬아슬하게 있는 가방 아래 이기광의 가방도 깔려 있는 걸 확인했다. 돌겠네 싶었는데, 이기광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태연하게 테이블로 걸어왔다.

“준형이 왔네.”

란다. 나는 지금 내 고뇌에 내가 쭉쭉 피골이 상접해 가는데 이기광은 볼수록 더 태연하다. 나는 눈을 매섭게 치켜뜨고 두 번째 윤두준이 채워준 잔을 집어 들었다. 어떻게 사람이 저럴 수가 있지, 이기광은 어쩜 저렇게 이기광스러울 수가 있는 건지 아무리 나에게 내가 물어도 답 같은 게 없었다.

“오늘은 술이 좀 받나보네.”

윤두준은 자꾸만 내 잔을 채워주었고, 이기광은 항상 셋이 둘러 앉아 있을 때와 별 다르지 않게 적당한 이야기의 추임새 정도와 적당한 양의 음주를 했다. 그런 이기광에게 난 일말의 자존심이라도 세우고 싶어서였는지, 그 얼굴을 단 한 번도 쳐다보지 않고 말을 섞지 않았다. 지금의 나는 유치해서 견딜 수가 없다.

저녁을 잘 챙겨먹지 않은 통에 금방도 알딸딸하게 취했다. 술자리를 피하지는 않아도 말술인 편은 아니어서 이미 조금 도가 넘은 건 알고 있었다.

“화장실 다녀올게.”

자리를 일어서는 이기광의 뒷모습을 따라 나는 자리를 일어섰다. 야, 나도 화장실. 윤두준에게 동의를 구했다.

이기광이 카운터에서 깡통 같은 열쇠를 집어 들고 가게를 나오는 뒷모습을 이제야 겨우 온전히 바라보면서 녀석이 뒷머리를 좀 잘랐구나, 무슨 옷을 입었구나, 그런 소소한 것 따위를 훔쳐보았다. 술집을 나오니 딴 세상처럼 조금 조용했다. 그래도 자정이 넘어가는 시간에 여전히 길엔 사람이 많았다.

“야, 이기광.”

나는 녀석이 열쇠를 들고 있던 손의 손목을 낚아채었고, 이기광은 돌연 휘청하고 불안정하게 나를 바라보고 섰다. 엄마야, 하면서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녀석은 날 올곧게 직시하고 있었다.

“얘기 좀, 하지.”

말이 벌써부터 좀 삐딱하게 나왔다.

“화장실 갔다 와서.”
“지금 해.”

나는 녀석의 손목을 단단히 부여잡았다. 녀석은 내게 잡힌 손이 조금 불편하고 아픈지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 어서 해. 그제야 이기광은 동의를 하고 섰다.

“친구 안 한다고 했잖아.”

이미 우리는 친구일 수가 없는 거다. 친구끼리 잠자릴 같이 하거나 하지 않잖아. 그런 식의 동의를 먼저 구하려던 차였다.

“그랬던가.”

도리어 녀석은 모른 척을 했다.

“일이 있었고.”
“…….”
“책임질게.”

연애보다 섹스가 먼저였던 건 분명 순차적이진 않았지만, 여러 종류의 연애가 있는 거다. 아무튼, 이제 바로 잡으면 되는 거라도 생각했다. 어차피 쌍방과실이라면 그게 맞았다. 뻔뻔한 걸로 치면 이렇게 그 일에 책임지겠다는 나보다야 그 일 자체를 아예 모른 척 하려는 이기광이 더한 게 아닌 거냐고, 난 당당한 척을 했다. 심장은 정말로 미칠 듯이 뛰어재꼈다.

“책임?”

무슨 책임.

이기광은, 확실히 비웃는 거였다. 지금 그 말은 필시, 나를 그저 한 낯 원나잇 상대와 다르지 않았음을 피력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나는 그런 녀석에게 어떤 말을 더 이어야 할지, 그 때의 사실을 발기발기 까발려 그러니까 우리는 이제부터 사귀는 거라고 억지를 부리고 싶진 않았다. 스스로 수긍할 수 있게끔 해서 더 좋은 관계로 발전하고 싶었다. 이건, 어떠한 여자들을 설득하는 것보다도 어려웠다. 이기광은 정말로 이기광일 뿐이었다.

“준형아, 미안한데.”

난 지금도, 잠은 아무하고나 잘 수 있어.
…….

혹시 그 때 일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실은, 나 그 때 술을 너무 많이 했었나봐.

“전혀 기억이 안 나.”

이기광은 지금 잔인한 말을 나에게 하고 있다.

“없던 일로.”

잔인하다.

“하는 게 어때.”

이기광은 내 생에 두 번째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없던 일로 하자. 는 건 원래 어떤 드라마를 봐도 내가 하는 게 분명하다. 근데 난 왜 녀석에게 이렇게 치졸한 기분을 맛보고 있는지 모르겠다. 승산 있는 게임에 물세례를 쫄딱 맞은 것같이 마음이 허하고, 급기야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난 다짜고짜, 녀석의 멱살을 잡았다. 세게 잡을 수도 없어서 부들부들 떠는 손으로 녀석의 옷깃을 세게 부여잡고 있을 뿐이었다. 때릴 테면 그래, 맞겠다는 듯 녀석은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 때, 담배를 꼬깃꼬깃하게 들고 나오던 윤두준과 마주했고, 나는 이기광의 면상에 주먹을 날리는 대신 그 입술을 집어삼켰다. 나란 녀석이 이 정도밖에 되지를 않았다. 이 순간에도 난 이기광이 좋았다. 그저, 상황이 안 좋을 뿐이다. 툭- 하고 윤두준이 들고 있던 담뱃갑이 쓰레기처럼 땅으로 추락했다.








이기광이 그 때, 내 혀를 세게 물어서버려서 생긴 영광의 상처 때문에 난 며칠 밥도 잘 못 먹고 염증에 시달렸다. 밥은커녕 말도 잘 못할 정도였다.

이제 이기광은 내 연락조차 받지 않았고, 이따금 윤두준에게서 이기광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 때 일은 서로 말이 없었고, 맹목적으로 이러다 말 거야. 하는 윤두준의 위로가 왠지, 마음에 들어서 난 그제야 비식 웃어보였었다.

“이기광, 좋냐?”

문득 윤두준이 학교에서 물었던 말이고, 난 긍정의 웃음을 뗬다. 그러면 윤두준은 조금 어려운 얼굴을 했다. 그렇구나. 그렇게 말하는 녀석은 더 이상의 것들을 함구했다. 나만큼이나, 윤두준이 아는 게 무어가 있겠냐며, 나는 그나마 작게 위로를 했다.
이기광에게 윤두준과 나는 그냥 그만큼이나 매 한가지로 똑같다.
윤두준은 외롬에 위로가 될리 만무하고, 난, 지금 이기광을 훨씬 더 외롭게 만드는 몹쓸 녀석이 되었다.

이러다가 혹여나 불시에 외롬을 타 집에 남자를 들이면 어쩌나 불안했다. 그 불안이 나날을 더 했다.

그래서 난 새벽에 이따금 녀석의 집에 찾아갔다. 굳게 닫힌 대문과 불빛 없는 그 집을 훔쳐보면서 나 나름 감시 따위를 하고 있었다. 정말 나 같은 놈은 미저리와 뭐가 다를 게 있나 싶었다.
이기광, 보고 싶다.
이따금 나 혼자 보내는 문자메시지라도 이기광이 잘만 확인해 준다면, 더 바랄 게 없었다.



확실히 나는 이기광과의 관계에 단절되어 있었다. 그걸 인정하는 데는 긴 시간이 들지 않았다. 날 보려고도 안 하는 녀석의 심기를 아주 잘 알 만큼, 이기광은 내 시야에 아예,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윤두준은 급기야 내가 묻지 않으면 이기광에 대한 말을 잘 안했다. 그게 난 굉장히 야속하기까지 했다. 예전에는 묻지 않아도 돌아오는 간접적인 것들이 많았는데, 이젠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그게 다 내 탓이었다. 그래, 내가 다 잘못했다 이기광아. 정말로 미안하다. 그런 자책감의 나날에 사로잡혀 있었다. 어떻게 하면 사과 같은 걸 할 수 있을까 궁리를 해도 묘안 같은 게 없었다.

이기광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 하더라도, 윤두준과 나는 별 다르지 않게 괜찮고 마음 맞는 시간대에 술을 나누고, 취해 집에 들어가고, 학교를 함께 다녔다. 생활에 이기광만 결여되어 있을 뿐, 나는 그럭저럭 잘 견뎌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저 내 상상안의 이기광에게 이따금 혀를 내둘렀다

나란 놈이 정말로, 그렇게 싫었을까. 매력이 없었을까.

그러면서도 정말로 아주 보이지 않는 이기광이 보고 싶어서 윤두준에겐 갖은 핑계를 대고 혼자 귀가 하는 길에 꼭 이기광의 과 건물을 에둘러 걸어보곤 했다. 혹시 그러다가 이기광을 만날지 모르는 일이다. 인사라도 할 수 있을까, 마주치면 어떤 얼굴을 해야 하나, 오늘 옷은 구질구질하게 입진 않았나. 향수를 잘 뿌리고 나왔나, 등등 머릿속에 그런 상념이 더 할수록 이상하게도 이기광이 더 시야에 보이지 않았다.

우습도록 신기한 일이었다.



새벽녘에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아 이기광의 집 대문을 서성이고 있다가, 윤두준을 발견한 적이 있었다. 주저앉아 있는데 시꺼먼 게 시야에 들어와 소스라친 적이 있었다.

“여기서 뭐하냐.”
“뭘 하긴.”

…그냥 앉아 있는 거지.

그 날, 윤두준과 나란히 이기광네 집 대문 앞에 걸터앉아 나는 주저리주저리 이기광에 대해 안 할 얘기 못할 얘기들을 했다. 술주정도 아니었는데, 말짱한 정신에 이런 걸 윤두준에게 터놓고 있는 자신이 너무 웃기고 수치스러웠다.

확실한 건, 지금도 좀 그렇지만,
내가 이기광을 좋아하는 동안 윤두준을 참으로 경계하고 미워했다는 거다. 혹여 아직도 둘 사이에 좋든 안 좋든 앙금 같은 게 있으면 그게 또 어떻게 둘 사이를 엮어 갈지 모르니까, 난 그게 참 불길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더 쿨하지 못하게 이기광에 대한 내 마음을 몰아세우고 급한 길을 끌어가려 했나보다고 했다. 요새는 답지 않게 이기광네 과 건물을 몇 번이나 돌아본 다고 지껄이며 윤두준이 날 바보로 알겠지 생각을 했다. 그래도 마음이 끊이질 않는지, 고민도 쉼이 없나 보다.

“준형아, 기광이 말이야.”

…실은, 휴학했어.

아주 갑작스럽게, 그렇게 되어졌다는 말을 녀석에게서 전해 들으며 나는 조금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지금이라도 이 담을 넘어 이기광네 집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 묻고 싶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도저히 감으로도 잡히는 게 없어서 고통스러웠다. 혹여 그게 나 때문은 아닐까, 고통스러워 할 찰나에, 윤두준은 너 때문은 아니니까 걱정 말고. 뭐 그런 시답잖은 핑계의 말로 날 위로하려고 했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내 마음이 더욱 이기광에게 외쳤다. 보고 싶다. 정말로 보고 싶어 죽겠다.

그 이상, 윤두준은 나에게 아무런 말도 말하지 않았다. 나는 윤두준도 그 이상은 모르는 게 분명하다고 믿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이제 더는 이기광에게서의 윤두준과 나를 비교하며 가늠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아마도 윤두준은 나보다 더 이기광에 대해 많이 알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것조차 인정하지 않으련다. 적당히, 아주 적당하게, 나도 이제 내 마음을 적당히 정리해 보려고 했다. 뭐든 부족할 것 없는 일상에, 연애도 적당히 공부도 적당히, 인간관계도 아쉽지 않게 적당히, 무조건 적당히만 외치고 살았던 나였다. 그 때로 돌아가기만 하면, 아무렇지 않아질 때쯤 녀석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답이 없는 생각은 항상 그랬다.
난 이기광과 그래도 나중엔, 잘 지낼 수 있을 거라고.



그러고도, 많이 힘겨웠다. 이기광이 없어진 캠퍼스 생활은 달갑지 않을 정도로 나에게 흥미가 없어졌다. 적당한 선을 지켜오던 여자도 몇 번은 만나고 짧은 시간 안에 헤어지고 그런 것도 조금 반복했다. 여자들과의 만남도 나에게 새로운 활력을 줄 리가 없었다.

윤두준도 그 사이, 나에게서 완벽하게 이기광을 차단해낸 것 같았다. 아주 신기하게도 우리는 누구도 먼저 이기광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이 없었다. 차라리 잘 된 일이다. 난 아직도 이따금 이기광이 생각날 때마다 녀석의 집을 찾아가곤 했지만, 이젠 그 집에 사람이 사는 건지, 이제 알 수조차 없었다. 휴학한 것도 까마득했는데, 이사를 갔다면 그걸 모르는 건 당연한 거였다.

내 삶의 영역에 녀석이 송두리째 없어진 것처럼, 충분하게도, 이기광은 나에게 그럴 수 있는 녀석이었다.
있던 것도 생각이 안 나고, 없던 일로 하자던 게 이기광 아니었던가.



그러고 보니 달수를 꽤 넘길 만큼 녀석을 보지 못했다. 근데 적당히 녀석을 지워 낸 내 마음에는 녀석이 아직도 적당한 채로 남아있고 또 지워져 있고를 반복했다. 이렇다가 다 지울 날이 머지않은 거라 자신해 보기도 했다. 그런 건 시간이 다 해결해 줄 거라 믿었다.



모르던 새에 자연스럽게 병무청에서 신체검사통보장이 우편으로 날아왔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나는 이거다 싶었다. 누군가는 군대 가기 싫어서 별별 수를 다 쓴다는 데, 나는 왠지 군대에서 2년 징역살 듯 하다 오면 머릿속도 좀 깨끗해지고 지워버리고 싶었던 건 이미 지워지고 없는데다가 새 삶이라는 게 가능할까 싶은 느낌이 들었다.
2년 유예만으로 이기광을 그리는 건, 뭐 충분하고도 남지 싶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윤두준이 예전에 했던 말이 생각났다

‘우리도 군대는 갈 거니까 말이지. 셋 다 함께 입대하거나, 혹시 셋 다 가는 게 어려우면 너랑 나랑은 안 겹치게 군대 가는 거 어때. 뭔가 바통을 주고받는 그런 거랑 비슷한 건데, 아무래도 이기광은 혼자인 거 잘 못 견디니까. 번갈아 입대하는 거.’

내가 그 당시 생각했던 미래 가운데에 윤두준보다 내가 먼저 군대를 가는 상상은 정말로 해본 적이 없었다.

아무튼, 약간 이기광과 내 관계가 어그러지긴 했지만, 상황이라는 게 이렇게 됐으니 그래도 다행이다 싶었다. 내가 이번 학기를 마치고 먼저 군대에 다녀오고, 그 다음에 바통터치 하듯 윤두준을 보내고, 윤두준이 없는 이기광을 보면서, 내가 그냥 친구사이였던 마음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이기광의 외롬을 함께해줄 ‘그냥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란 기대를 조금 했다. 마음이 그저 한 결 가벼워졌다. 나는 곧바로 윤두준에게 연락을 했지만, 윤두준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나는 한 번 고개를 갸웃 하다가 일단은 신체검사를 받고 나서 말하자는 시간을 좀 벌었다. 아무튼지 간에야 윤두준에게 내가 군대 갈 날짜를 까먹고 말을 안 하겠나 싶었다. 심검은 입소날짜에 비할 게 아니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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