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oxo, text
 
 

 

I`m sor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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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위복이라고 했던가. 상황에 정확히 들어맞는지 모르겠지만, 꽤 이기광과 나의 관계는 그렇게 정의될 수도 있었다. 윤두준이 갑작스럽게 던지고 간 둘만의 인간관계에 대한 과제를, 이기광과 나는 그럴 듯하고 보기 매끄럽게 잘 풀어가고 있었다. 윤두준이 없이 점심을 먹는 것도 익숙했고, 윤두준 없이 도서관에서 시험공부를 하는 것도 익숙해졌다. 윤두준과 셋일 때처럼 말소리가 끊이질 않고 웃음기가 꽤 넘치는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그런 대로, 이기광과 나만의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정확하게 어떤 분위기라고 말할 순 없었지만, 적어도 윤두준과의 세 명이 함께일 때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르다.

그동안 서로 상호작용이 꽤 없었던 시점을 두고, 현재 이기광의 입에서 가장 많이 나온 말이라면 단연,

아, 내가 말 안했었나.

같은 거였다. 하긴, 우리는 서로 헷갈릴 만 했다. 윤두준이 우리 둘 사이에서 얼마나 적당히 조율을 해 서로에게 전달효과를 내었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기광은 대강만 보아도, 저 자신에 대한 모든 일거수일투족, 윤두준에게 했던 모든 이야기들이 나에게 낱낱이 전해졌을 거라 생각한 것 같았다. 그렇지만, 나도 새삼, 내가 이기광에 대해 아는 게 이렇게 없었던가, 나한테 윤두준이 이렇게나 말을 안 했던가, 에 대해 한동안 고민했다.


시험기간이라 새벽까지 학교를 떠날 일이 없는 수많은 학생들처럼, 나도 이기광도, 심지어는 윤두준도 그랬다. 윤두준은 여자를 학교에서 집으로 돌려보내고서야 겨우 이기광과 나 사이에 껴들었다.
새벽시간까지 부산스럽기만 한 학교 안의 편의점에 윤두준을 사이에 두고 나와 이기광이 갈라져 섰고 서로의 앞에는 제 취향의 라면이 하나씩 놓였다. 처음에는 윤두준의 연애에 대해 의무적으로 듣다가, 딴 생각을 했는지, 아니면 생각이 다 없어졌는지, 머릿속이 온통 허옇고 검었다. 피곤해서 그런가. 그러다가 제 정신으로 돌아오고 나니 어느새 우리 셋의 화두는 이기광과 나에게 잔뜩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관계적 의미에 대하여 재정립 중에 뱉어진 마지막은 아주 간단했다.
이기광과 나는
‘서로가 서로를 아직도 잘 모른다는 것.’
‘그동안 너무 몰랐다는 것.’
‘알아가고 있는 중이니, 아직은 규정지을 수 없다는 것.’

“내가 장담하는 건데.”

내가 말했어도, 준형이 넌 대부분 흘려들어.
……
백프로.

아니, ‘이기광과 나는 서로를 잘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은 알려하지 않았다는 것.’

이 사태에 대해 윤두준이 확신하고 나섰을 때, 나나 이기광이나 일부는 수긍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 태도에 항상 문제시 되고 마는 ‘필요 이상의 선택적 경청자세’를 물고 늘어진 타당한 결론이었다. 아마 이기광도 그런 건지, 서로 반박할 수가 없었다.
반도 먹지 못한데다가 잔뜩 불은 컵라면을 휘휘 저어보다가, 빈 웃음이 떨어졌다. 성의 없는 인간관계의 종말을 보여주는 구나, 나란 놈이. 채찍질 같은 질책을 해보았다. 그 와중에도 이기광은 우리의 대화에 참여도 없이 전쟁이라도 난 것처럼 급하게 컵라면을 후루룹거렸다. 사실, 셋이 뭉쳤을 때 대화라기 보단 일방적으로 많은 윤두준의 화술은 뭐, 그야말로 대단할 정도였다. 힘들지도 않은가.

“밥 안 챙겨먹고 다니지, 이기광.”

윤두준이 허리까지 구부려 컵라면에 코 박고 있는 이기광에게 제 얼굴을 들이밀었고, 이기광은 극적인 긍정을 해보였다.

“아침부터 아무것도 못 먹었어.”

지나가는 말에 나도 윤두준도 기염을 토했다. 지금 밤 11시거든, 이기광아.

“준형아,”

너 안 먹을 거면 나 줘.

불어서 흉측하다 싶었지만, 난 기계적으로 컵라면을 이기광에게 건넸고, 이기광은 거리낄 것 없이 제가 받아든 컵라면을 마시듯 삼켜내었다.

“잘 먹네.”

윤두준은 언제와도 다를 거 없이 이기광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윤두준과 이기광은, 매번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경악스러울 정도로 사람을 챙기는 데에 도가 튼 윤두준이나, 사람이 아무리 손을 잘 타도 저와 같은 나이의 녀석에게 넘치는 관심을 받고 그걸 익숙해하는 이기광도. 그러니까 이젠 너무 익숙한 대인배 오지랖의 윤두준보다도, 사뭇 다른 이기광이. 그러니까 이기광이. 그런 이상한 이기광이.
……



새벽 두세 시 즈음, 셋이 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가는 길이었고, 유난히 고요하기만 한 차 뒷좌석에 윤두준과 이기광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윤두준의 어깨에는 잠에 빠진 시체 이기광의 머리가 놓여져 있었고 이기광이 불편하지 않게 그 어깨를 감아쥔 윤두준의 손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앞좌석에 덩그러니 앉아 새까만 창문으로 그 둘을 훑어보던 내 시선이 느껴졌는지, 곧 윤두준과 눈이 마주했고, 난 별 것 없이 피곤한 척 눈을 감아버렸다.
윤두준과 이기광에게 익숙한 것, 나도 별 반 신경 쓰지 않았던 것들이. 왜 새삼스럽게 내게 신경이 쓰일 정도가 된 건지 모르겠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시험 때문에 평소보다 백배는 무거워 진 것 같은 이기광의 가방과 이기광 자체를 짊어진 윤두준을 쳐다보았다. 이기광의 가방만은 좀 들어줄까, 싶다가도 그냥, 그만두게 된다. 귀찮다. 피곤하다. 짜증스럽다.

“가라, 준형아.”

이기광과 우리 집 사이를 대번 갈라내는 길에 섰고, 윤두준은 불편한 자세를 하고도 얼굴에 시원한 미소가 있다. 심지어는 늦은 밤에 밀려오는 피곤도 없다.

“어, 너는.”
“난 기광이네서, 자지 뭐.”

못 본 새 더 가벼워졌다, 이기광.

조심스레 고쳐 업어보는 윤두준의 얼굴에는 그 흔한 귀찮음 역시 없었다. 원래 이런 녀석이지, 싶다가도 한 여름의 미적지근한 바람처럼 어느 것에도 열의 없는 나를 탓해보았다. 배울 점이 많은 녀석이다. 윤두준은.
……
그리고 윤두준의 등에 업혀 세상모르게 자고 있는 이기광의 자그마한 머리통을 바라보았다.
손이 많이 가는 녀석이다. 이기광은.





_







수업의 시작시간이 비슷했으니까, 시험도 비슷하게 치러질 거라 생각했던 게 큰 오산이었는지 모르겠다. 이기광의 집 앞에서 대강은 익숙하게 전화를 걸고 나와라, 학교 가자. 했는데, 이기광의 집에서 나온 건 윤두준이었다.

“기광이 오늘 시험 없대.”

응, 나갈게. 하고 유쾌하게 빈 말을 한 이기광은 코빼기도 비치질 않았다.
그러니까 나온다는 말을 왜 해. 시험 없다고 하면 되지.
……
물끄러미, 죄도 없는 핸드폰을 괜히 깔아 보았다.

“기광이네서 잘 자나봐 너는.”
“고등학교 때보단 줄었지.”

…그런가.
어, 그 때부터 아마 부모님이랑 안 살았지.

고등학교 때 벌써 혼자 살기 시작했다는 이기광을, 고등학교 때 윤두준이 이기광의 집에 밥 먹듯이 드나들었다는 것조차 내가 알 리가 없었다. 이런 것도 참 새삼 신기한 일이다. 이제야 알아가는 윤두준과 이기광의 관계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깊은 우정이었던가에 잔뜩 초점을 맞췄다가 머리가 아파서 그만두었다. 그래봤자, 지금의 나와 이기광의 관계보다야 나은 거겠지, 싶다.


학교 앞에 도착하자마자, 여자 친구의 전화를 받던 윤두준은 시험 강의실에서나 잠깐 다시 볼 수 있게 되었고 나는 무심코 내 비어있는 옆을 내려다보았다. 쳐다보았다기보다 내려다보았다는 게 맞았다. 꼭 그만큼에 이기광의 동그랗고 작은 머리통이 있곤 했으니까.
그리고 괜스레 쯥, 하고 혀를 찼다. 존나, 공부하기 싫은 과목 몇 개가 있는데, 이제는 이기광과 공유할 수 없는 내 전공의 과목들이라는 것이 괜히 씁쓸했다. 고등학교 때, 이기광에게 챙김을 받은 게 윤두준 뿐 아니라 나 역시 그랬더라는 걸 이제야 완벽하게 깨달아버렸다.
이기광은, …뒤늦게 사람을 머쓱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나보다.



오늘 본 교양시험이야 그럭저럭 적당하게 열심 없이 보낸 건, 중요한 전공시험이 당장 내일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게다가 대학 입학 첫 중간고사의 피날레를 장식할 시험이다. 집에는 학교 도서관에서 밤샘한다고 통보하고 나왔는데 그걸 전철을 타자마자 기억해냈다. 아직 점심도 못 먹어 출출한데, 갑자기 집에 들어가기가 싫어져서 걸음이 무거웠다.
어차피 탄 전철을 무를 수도 없어 집어타기는 했는데 머리를 아무리 굴려도 딱히 묘안이 없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오는 역 앞에 새로 커피숍이 생겼는지 못 보던 가게를 보자마자, 불현 듯 녀석이 생각났다.

“…….”

이기광이.




다짜고짜 대문을 밀고 들어오긴 했는데, 현관 앞에 선 이기광이 날 주욱 훑어보았다. 목에 가방을 대강 매고 한 손에 든 아이스티와 커피 테이크아웃에 다른 손에는 편의점에서 산 컵라면과 맥주 그 밖의 과자 등이 든 봉지. 무겁지도 않은 걸 들고 나는 좀 겸연쩍은 척을 했고, 두터운 뿔테안경을 뒤집어 쓴 이기광은 무슨 일이지 싶어 벙 뜬 얼굴이었다.

“숙박비.”

양 손에 든 한 짐을 이기광에게 끌어 안겼고, 이기광은 반사적으로 그걸 받아들었다. 난 대번에 놓치지 않고 무르기 없기! 를 외쳤다.

신발을 벗고 집 안에 들어서는데, 괜히 발끝이 후달렸다. 첫 방문이라 떨리는 거지 싶다.
조용한 이기광의 집 안에는 거실 탁자위에 윙윙거리는 노트북 말고는 대부분 정지된 채였다.

“안 그래도 라면 물 올렸는데, 같이 먹을까?”
“어? 어.”

어어.

나란 놈도 손님은 손님이라고, 이기광은 부산을 떨기 시작했다.


누구와 같이 사는 것도 아닌데, 꼭 혼자 사는 집에 수저 둘 칫솔도 둘 이인분 정도가 가능한 거 보면 윤두준이 정말 제 집 드나들 듯 했나보다 싶었다. 라면 끓이는 걸 둘러보러 간 부엌에 수저는 그렇다 치고 화장실에 손을 씻으러 들어갔다가 본 칫솔은 진짜 경악했다.

노트북이 놓여있던 작은 테이블에 머리를 맞대고 경쟁적으로 라면을 들이키다가, 젓가락질, 잘 못하네. 무디고 동그란 녀석의 손가락을 훔쳐보고 비죽 웃었다. 그 타이밍에 후릅후릅 잘만 라면을 먹고 있는 이기광과 마주했다. 온전히 가까운 시선에 마음이, 생각이 들킨 것처럼 철렁했다.
……
짧은 정적이, 있었다.
…와, 망할. 이렇게 어색할 수가.

“시험은 잘 보고 있어?”

다행이도 나대신 이기광이 먼저 운을 떼 주었다. 괜히 말문이 막혀서, 드세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시험 몇 개 남았냐.”
“오늘 자정까지 내야 되는 리포트 하나.”

어, 난 내일 오전 전공과목 하나.

이 대화를 끝으로 우리는 라면이 가득했던 냄비의 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별 다른 말을 나누지 않았다. 이따금 간간이 마주앉은 녀석의 머리와 내 머리가 스쳤을 뿐이다.


설거지 해줄게.

자신 있게 말은 했는데, 싱크대 앞에 서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어영부영하고 있는 날 알기라도 했는지, 이기광은 싱크대 옆에 붙어 서서 결국 프흐흐흐흐, 하고 새는 웃음을 내었다.

“설거지 처음이구나.”

싱크대 앞에 선 내가 무진장 창피했다.
그러고 보니 스물 평생 해보지 않은 게 수두룩하다만, 설거지조차도 한 번 해본 적이 없다.

“두준이도 우리 집에 와서 처음 설거지 배웠는데.”

그래도 두준인 고등학교 때였어.
……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다.



서걱서걱 전공 책 위에 따분한 그림을 그리 듯 하던 손을 내려다보다가, 타이핑을 하고 있는 이기광의 손을 쳐다보았다.
집중력이 좋구나.
설거지를 끝내고 본격적으로 공부를 위해 앉은 지 세 시간이었다. 좀이 쑤실 만도 한데, 미동이 없다. 컴퓨터 화면을 반사하는 이기광의 안경에는 하얀 문서에 까만 글자가 깨알같이 적혀지고 있었다. 전공 책 위에 들고 있던 샤프를 데구르르 굴리고 말자, 자연스럽게 이기광의 타이핑도 멈추었다.

“좀 쉴까?”
“넌 하던 거 해.”
“담배 필래?”

…두준이 피우던 거, 집에 좀 남았을.
아, 나 담배 안 해.

담배 안 하던가, 되묻던 기광의 얼굴에는 분명 의아함이 섞여 있었다.
고등학교 때, 윤두준이 피우면 으레 하는 거구나 하고, 나도 피우긴 했었다. 이상한 건, 분명 주의사항에 일단 흡연하게 되면 끊기가 매우 어렵다고 쓰여 있지만, 나에게는 담배조차 절대적인 중독성을 자랑하지 못했다는 거다. 적당한 삶에 흡연에 조차 열심을 내지 못하는 나는 아무래도 문제가 심각하긴 했다. 분명, 결여된 무언가가 있나보다.

“끊은 거야?”
“…그런지도.”

가끔 피울 때가 있긴 했어도 그건, 윤두준이 피울 때 곁다리로 잠깐 태우는 것뿐이다. 고등학교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다.
그러고 보니, 여자 친구가 담배냄새를 싫어한다는 핑계거리로 윤두준은 금연을 실천 중이었고, 그래서 나도 자연스레 담배를 입에 대는 일이 없었다.

“윤두준, 금연 중 아니던가.”
“우리 집에 와서 몰래 피는 거지.”

줄이긴 했는데, 끊는 건 잘 안 되나봐.

그렇군, 하고 고개를 끄덕이자, 이기광은 내 억양을 따라, 내 행동을 따라 똑같이 ‘그렇군.’ 을 외쳤다. 그러던 이기광이 빙글 웃었다. 요즘 내가 녀석에게 자주 하는 습관적인 말과 행동이라며 계속해서 따라해 보이는 걸 나는 비죽 웃어버렸다. 비슷한 가보다. 나도 녀석에게 자주 듣는 ‘아, 내가 말 안했었나.’ 같은 것과 다를 바 없으니까.




두세 시간에 한 번씩 시험공부의 텀을 가진 나와 이기광은 과자를 몇 개 뜯었다가 해가 지자마자는 맥주 캔을 땄다. 내 껄 먼저 따는 김에 녀석의 것도 뚜껑을 따 내었더니 캔 입구로 흘러넘치려는 거품을 녀석이 놓치지 않고 급히 마셔버린다. 병뚜껑을 따던 내 손가락으로 미지근한 이기광의 입술이 닿았다가 금방 떨어진다.
……
스윽, 하고 난 셔츠 밑단에 그 손가락을 닦아내었다.

“근데, 밥 안 먹고 사냐.”
“그건 좀 귀찮아.”

오호, 이기광이 귀찮아하는 것도 있다. 혼자 살고 있다는 걸 좀 빨리 알았으면, 내가 좀 녀석을 챙겼으려나 하고 맥주를 몇 모금 들이켰다. 너무 시원해서 한기가 느껴질 정도라, 몸을 좀 떨었다.

“너 혼자 사는 거, 나 오늘 알았다.”
“아, 내가 말 안했었나.”

맥주를 한 모금 더 마시려다가 다행이, 입에 넣기도 전에 먼저 웃음이 나왔다.
아, 내가 말 안했었나.
드디어 나왔다. 이기광의 입버릇.

“가끔 우리 집 와서 밥 먹어.”
“가도 돼?”
“우리 엄마가 너 진짜 좋아하거든.”

어머니가?

신기하네, 하고 혼잣말을 내뱉는데, 신기한 건 오히려 나였다. ‘어머니’라니. 누구에게도 들어본 적 없는 생소한 호칭이다. 그러면서도, 아주 예전에 녀석의 엄마의 장례식에서 보았던 걸 기억했다. 왠지, ‘엄마’라는 말이 금시기 된 단어가 아닐까하고 눈치가 보였다가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녀석의 행동에 그만 안도했다.
지금만 이렇게 조심스러울 뿐이지, 녀석과 윤두준 만큼 허물없이 가까워지고 나면 이런 신경도 거의 쓰이지 않겠지 싶다.



규칙이라도 정한 것처럼 서로 맥주 한 캔을 다 비우고 나자마자 간단한 뒷정리를 끝내고 다시 공부모드에 돌입했고, 자정이 되기 10분 전 리포트를 교수님 조교 메일로 보낸 이기광은 노트북을 가지런히 닫아놓고 구부정하게 탁자아래 몸을 구겼다.

“피곤하면 들어가서 자.”
“너는?”

나, 밤샘.

당연한 듯 말하고 났더니 이기광은 누운 몸을 고대로 질질 끌고 내 허벅다리에 제 머리를 구겨 넣었다.
나 여기서 잔다? 졸린 듯 금방 끔벅끔벅하던 이기광의 눈꺼풀이 금방도 닫혔다. 마땅히, 녀석의 이 돌발행동에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한참을 가만히 있었더니, 그새 잠든 시체 이기광으로 변신해 있었다.
……
방에다 재워야 되나 싶다가, 그냥 두자 싶다가,
……
……
간간히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해주고, 깨지 않게 조심히 뿔테안경을 벗겨주었다. 뭘 그렇게 혼자 긴장했는지 모르겠는데, 몇 시간동안 녀석의 머리가 안착된 다리가 저린 줄도 몰랐다.




그 와중에 가장 경악했던 건,

새벽 5시 쯤 해가 뜨기 전에 녀석을 제 방에 옮겨다놓고, 졸음을 이기기 위해 씻으려고 겸사겸사 화장실에 들어가 세수를 하다가, 욕실 선반에 하나 남은 새 칫솔을 꺼낸 후, 머리를 감으려는데, 이기광이 쓰는 샴푸가, 내가 쓰는 평범하고 흔한 것과 다르지 않다는 걸 발견한 거였다.





_







드르르르----

귀에 불현 듯 선명한 핸드폰 진동에 잠이 확 달아나 허리를 일으켜 세웠다. 아침에 전공시험을 치르고 멍한 정신을 추스르려 집에 도착하자마자 방 침대에 하강, 그대로 잠이 들었나보다. 벌써, 새벽 2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다. 푹 잘도 잤는지 몸도 마음도 한결 가볍고 가뿐했다.

“어.”

그래도 잔뜩 잠긴 목소리는 겨우겨우 소리를 내었다.

- 자고 있었어? 미안.

이기광이다.


뭘 하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윤두준과 셋이 잘 가던 술집에 가까운 그 골목 어귀에 즈음에 서있다고 했다. 차가 끊긴데다가 택시를 타기에는 수중의 현금이 영 마땅치가 않고 은행 ATM기기도 찾아나서기엔 꽤 귀찮은 일이라, 가능하다면 혹시 나와 줄 수 있겠냐는 말에 흔쾌히 그러겠다고 해주었다. 수능 후 대강의 학생들이 그렇듯 조금은 무기력하게 지내다가 아빠의 권유로 운전면허를 따기 위해 학원을 다녔고, 그 대신 나는 면허를 딴 값진 성과로 차대신 쌔삥 오토바이를 한 대 뽑을 수가 있었다.
오토바이를 뽑았다 말만 하고 다녔지, 제대로 녀석들에게 보여준 적이 없어 오늘 끌고 나갈 생각이었다.


길을 미끄러지는 감이 좋아서 속력을 조금 내었다.




술집이 줄줄 늘어선 골목들은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였다. 어디쯤 있을까 몰라 뒷주머니의 핸드폰을 꺼냈는데 녀석에게서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안 나와도 되겠다. 미안.
……

“뭐야, 이 새끼.”

나와 달라고 할 땐 언제고 거두절미한 문자에 쯥, 혀를 차 버리곤 오토바이에 탄 채로 슬렁슬렁 골목 여기저기를 돌았다. 무슨 일이 생겼나 하다가도, 이 새벽에 윤두준도 나도 없는 길에 저 혼자서 뭘 하겠나 싶어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녀석을 금방 찾아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아는 사람인지 내가 모르는 어떤 이와 함께 마주보고 서 있다.
……
저 사람과의 일이, 안 와도 된다는 사정이겠지 싶어 오토바이 방향을 돌리는 데, 묘하게 딱 붙어 선 게 위험하다 싶더니, 심하다. 저건 도가 지나친 희롱이다. …그것도 남자가 남자한테. 녀석과 아는 사람인가 싶다가도, 아는 사람이라도 저러면 안 되지 싶은 정의감에 불타 바이크에서 내려 빠른 걸음을 걸어 이기광의 목에 거의 얼굴을 파묻다시피 한 남자의 뒷목의 옷자락을 있는 힘껏 끌어내었다.
악, 하고 균형 없이 넘어진 남자는 꽤 술에 취해 보였다.

“준형아.”

그보다, 더 놀란 얼굴의 이기광의 눈은 튀어나올 듯이 동그랬다.

“야 임마. 너는.”

골 때리는 놈들이 추행하려는 줄도 모르고, 뭘 그렇게 멍청하게 서 있어. 이렇게 시시껄렁한 놈들 위험하잖아. 너 여잔 줄 알고 착각하는 거 안 보이냐. 골 때린다 진짜, 어리버리 까지 말고 정신 똑바로 차리란 말이야.

이기광이, 내가 아는 놈이라 그랬을 수도 있고, 이런 관경은 태어나 생판 처음이었던 데다가 정말 놀라기까지 해서 그랬을 수도 있는데, 처음에 내뱉을 때는 조용조용 시작한 목소리가 마지막에는 골목이 떠나가라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는 판에, 기광이 잔뜩 얼어 있었다.

아, 화를 내려던 게 아니라.

이런 나까지 내가 당황스러워서 우물쭈물 마른세수를 하고 나자, 이기광은 한숨을 팍 내쉬며 잔뜩 힘주었던 어깨를 풀고, 입을 꾹 다물었다.
곧 하릴없이 픽 웃는 녀석에게 손목을 붙잡혔는데, 찬 새벽기운보다 훨씬 뜨거웠다. 열의 차이가 대단하다.

“아니야, 준형아.”

그런 거 아니야.

고개를 계속 가로저으면서 나직이 부정하는데, 난 녀석이 정확히 뭘 부정하고 있는 줄 몰랐다. 이상하다. 피해를 본 이기광에게 도리어 내가 화를 내고 있었고, 또한 예상치 못한 녀석의 반응이, 날 겁먹게 만든다.

“내가 말 안했었나.”

……
두준이도 말을 안했었나. 한 줄 알고 있었는데.

내가 ‘무언가’를 알지 못하고 있는 것에 꽤 충격이 컸는지, 이기광은 말을 잘 잇지 못했다.

“뭔데 대체 그게.”

내가 따지듯이 묻자, 이기광이 별 수 없다는 듯이 비죽 웃었다. 아니, 웃은 게 웃는 것도 아니었다.

“나 말이야.”

네가 흔하게 여자와 하는 연애 같은 거.
……
난 남자랑 해.

고등학교 때, 두준이랑 나 사귄 것도, 혹시 …몰랐어?
……
……


씨발. 난 지금, 이기광이,
무슨 개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to be continued

반전이라면,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모르지만(....)

그저, 까발려진 사실 앞에 당면한 녀석들. 그래서 1편보다 중요한 2편.
‘지극히 평범한 연애’를 할 거라 믿었던 용준형과 이기광의 이야기.

 
엄마야- 첫 덧글인가요 :) 새벽에 문득 생각이나서, 알바마치고 자기전에 들어오고싶어서 와봤더니 2편을 훌쩍읽어버렸네요. 준형이 가슴에 꽝하고 와닿았을 기광이의 발언..제 가슴에서 울렁거리는 느낌. 푸리에님 글을 읽을때 드는 묘한 느낌이 있어요 :D!자기전에 좋은글 읽고갑니다. 좋은꿈꾸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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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 뒷통수를 때리는 이거순 먼가효? 아 그랬구나 그랬었구나 ............................................................................
나 근데 왜 말이 안나오지요? 기광이가 그쪽 취향이라는 것은 알았는데 두준이와 사궜을거란
생각은 전혀 못 했었어요 암튼 좀 충격이네요 제가 1,2편 연달아 읽으면서 준형이에 너무
빙의되었었나봐요 아님 저도 준형이가 같은 무심한 성격이라서 그런건가 좀 많이 놀랬어요
다음편이 궁금하다기보다 준형이는 어떠려나? 라는 걱정이 드네요 나 너무 몰입했나봐요 ㅎㅎ
delete
아....아............아 어떡해... 진짜 머리 한 대 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ㅠ ㅠ 준형이에게 너무 이입해서 읽었나봐요ㅠㅠ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라 제가 충격이네요ㅠㅠ 다음편에는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벌써부터 기대돼요ㅠㅠ 잘읽었습니다ㅠㅠ!
 
용준형=나..인가여..? 준형이 시점이라 그런지 준형이한테 완전 닥빙이네여.. 특히 마지막 두줄은 딱 제 심정이랄까. 하하. 전 이 글이 노멀인 두 사람의 이야기인줄 알았는데..흐흐. 반전이네여. 알게 된 준형이의 다음 행동들이 궁금해지네요. 다음 편도 기다릴게여!
 
주... 주녕아. 왠지 저도 때려맞은 듯한 이 기분. 아, 물론, 기광이가 그쪽취향일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준형이 앞에서 까발리게 될줄이야. 그러니까 이야기좀 하고 깊은 사이였어야지 주녕아ㅠㅠ.... 지금은 혼란스러운 용준형이 된것만 같은 기분.
 
이기광과 나는 서로를 잘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은 알려하지 않았다는 것. 이 부분이 너무 마음에 들었어요. 알려하지 않았던 둘이, 서로를 서서히 알아가면서 둘이 지극히 평범한 연애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준형이의 시각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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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리에님 정말...밤에 잠을 못 이루겠어요ㅜㅜ 저 미묘한 심정변화들!!!
정말 아주아주 바람직해요!!!!!!!
 
헉... 했습니다. 역시 과거가 있는 관계는 절대 평범하게 보일 수가 없다더니. 두주니랑 기광이가 사겼던 사이... 준형이 아주 심기가 불편하겠네영 ㅜㅜ 주녕이 파이아 모드 돌입!!!! 그렇지만 보는 입장으로선 즐겁고 훈훈할 뿐 ㅎㅎㅎㅎㅎㅎㅎ
 
와우... 읽으면서 느낌이 쎄한게 혹시나했는데 역시나 였군요ㅎㅎ
더재밌어지네요ㅎㅎ
 
헐~~ 진짜..반전이네요.. 근데 두준이랑은 좋게 헤어졌는건가요?? 어떻게.헤어지고도..저리 잘 지낼수가 있을까요??? 주녕이 충격이 장난아니겠어요..
 
푸리에 님 글을 읽을 때 마다 느끼는 거지만 1인칭 시점이 보여줄 수 있는 미묘한 감정선의 최고점을 찍어주시는 것 같어요ㅠㅠ 완벽한 감정이입!! 읽을 때마다 감동이네용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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