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oxo, text
 
 

 

I`m sorry:)

 


 |  ♥ (4)  HYUNGKWANG (30)  DUKWANG (1)  SEOBKWANG (1)  TRIPLE (1) 
 login



뭐든 부족할 것도 없이 그렇다고 욕심이 많은 것도 아닌 조잡하고 느슨한 일상에, 연애도 적당히 공부도 적당히, 무조건 적당히만을 외쳤고, 유독 귀찮아하는 건 공부뿐만 아니라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였다. 학구열에 잔뜩 치여서 병든 닭이든 공부하는 기계든, 딱 그 정도로 전락해가는 열아홉까지 돈독히 해오던 친구 놈은 딱 둘이었다.
둘 중 한 놈인 윤두준은 온통 열심을 자랑하던 운동보다 공부머리가 좀 덜했지만 그래도 반에서 상위권에 속했고, 나머지 한 놈인 이기광은 매일 부산스럽게 쉬는 시간마다 날 찾아와 영어지문을 펼쳐놓고 이게 뭐다 저게 뭐다 날 가르치려들고 또 그만큼 제일 열심히 공부를 하곤 했지만 매번 노력한 만큼의 점수나 등수를 얻는 법이 없었다.
내 ‘적당한’ 인생관과는 상관없이 그렇게, ‘친구’라 이름 지어 묶어놓은 두 녀석은 매우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곤 했다.

난 원하는 공부만 ‘잘’했다. ‘열심히’라는 말을 붙일 만큼 해본 게 실은 별로 없었다. 선생이 마음에 안 들면 혼자 공부하는 축이었고, 마음에 드는 과목은 선생이 뭐라 씨부리든 상관없이 해댔다. 좋은 점수의 과목과 나쁜 점수의 과목이 매번 상극으로 갈렸지만, 나쁘지 않은 상위권을 지킬 수 있었던 건, 내가 유난히 싫어하는 과목을 이기광이 잘 챙겼기 때문이었다. 매번 쉬는 시간마다 날 찾아오는 이유도 별 반 다르지 않았다. 녀석의 덕을 톡톡히 보게 되는 건, 시험점수에서 항상 나타나곤 했다. 바닥을 쳐야 할 과목들이 그래도 간당간당하게 꾸준한 점수에 잘 붙어 있곤 했다.
무상으로 내 과외 봉사를 해 오던 이기광은 결론이 난 점수들에 매번 뿌듯해했다. 그건 우리 부모님도 그랬다. 유독, 이기광이라면 다 좋아했다. 실제로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졸업사진으로나 겨우 한 번 본 녀석을.



고등학교를 그럭저럭 붙어 다녔던 것과 같이, 우리 셋은 나쁘지 않은 네임밸류의 대학에 동시에 입학을 지원했고, 이기광을 뺀 윤두준과 나는 예비합격자로 겨우 턱걸이를 하긴 했지만, 함께 대학을 가게 되었다. 거기까지야 상관없었지만 신입생환영회가 있고서 아주 뒤늦게야, 나는 이기광이 우리와 다른 과, 전혀 다른 학부를 지원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뭐야, 몰랐어?”

윤두준은 의외라는 듯이 물었고, 난 너무도 당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학에 들어왔어도, 우리 셋은 여전히 같은 식당에서 밥을 먹고 비슷한 시간에 강의를 들었다. 다만 좀 달랐던 건, 이기광의 강의가 끝나는 시간의 미약한 차이 정도였다. 난 윤두준이 이기광을 기다린다고 하면 같이 기다렸다가 함께 집에 가고, 이기광에게 다른 일이 있어 우리와 함께 집에 가지 못하게 되면 그게 또 당연하듯 윤두준과 둘이 집에 돌아가곤 했다.

“내가 말을 안 했던가.”

이기광도 고개만 갸웃했다.

“야, 너희 벌써 4년을 알고 지낸 건데,”

어쩜 그렇게 둘 다 무심하냐.
……
신기하다, 신기해.

알고 지낸 4년이 어떻다는 것에 대해 논하자는 건 아니지만, 요즘 조금씩 자각을 하게 된 건, 이기광과 내가 비슷한 부분에서 장단이 맞아 서로 극도로 무감각 하다는 것이었다. 고등학교 때도 별 반 다를 것 없이 셋이 붙어 다녔지만, 정작 이기광과 나는 서로의 관심사나 일상들을 속속들이 묻고 알아야 하는 필요성을 느낄 만큼, 그러한 정도의 명분을 가진 친구는 아니라는 거였다.
게다가 서로에게 필요한 질문이라면 윤두준에게서 먼저 그 정보가 돌아왔다. 직접 말하지 않아도 윤두준에게 건너듣는 정보가 언제나 정확했으므로, 그게 너무나 당연시 되어 있었다.

그런 이기광과 나의 관계에 ‘위기’로 돌아온 사건은, 바로 ‘윤두준의 연애’였다.







지극히 평범한 연애







윤두준과 내 학번의 학과 동기들은 유독 남자가 많았다. 그런 데에 비해 이기광이 다니는 학과에는 여자보단 남자가 귀했다. 윤두준의 처음 목적이 따로 있었는지 몰라도, 아무튼 여전히 이기광과 나를 챙겨들던 윤두준은, 이기광 네 과에서 제일 예쁘다던 동기의 여자를 꿰어 찼다. 굳이 묻지 않아도 주도면밀하게 우리에게 물밑작업에 대해 떠들었던 녀석은 원하는 상대와 연애를 쟁취했고, 나와 이기광은 감흥 없이 그렇게 되었군. 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냥 똑같은 소개팅이잖아.”

그것도 내가 주선한.

이기광은 윤두준의 연애의 시작과 동시에 뒤늦게야 나에게 그렇게 말했고, 난 또한 그랬군, 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윤두준은 이미 그 전부터 여자에게 호감이 있었고, 이기광에게 부탁해 자리를 만들었다는 것.

아무튼, 윤두준은 여자와 사귀고 난 후부터 ‘우리 셋’이라고 생각했던 모임에서 자연스럽게 이탈을 일삼고는 했다. 제 연애에 신바람이 난 녀석을 억지로 잡아두고 싶진 않았지만, 이기광과 둘 뿐인 자리는 생각보다 꽤 어색했다. 그냥,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믿고 싶었는데, 이기광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았는지 우리는 서로 전혀 상관없는 눈치를 보고 있었다.
테이블 아래로 다리를 꼬려다가 마주앉은 녀석의 다리를 삼단 콤보로 발길질을 한 셈이 되었다. 나는 놀랐고, 녀석은 나를 한 번 쳐다보았다. 나는 으쓱했고, 녀석도 별 것 아닌 듯이 갸웃 했다.

“저 새낀 연애 한 번 요란하게 한다.”
“처음이잖아.”

내버려둬.

이기광은 어울리지도 않게 꽤 야들한 얼굴로 웃었다.
그러고 보니, 윤두준은 대학에 입학하고 나면 우리 셋 중 제일 처음으로 여자와 사귀겠다는 말을 약속처럼 내세우더니 그걸 지켜냈다. 스물에 첫 연애를 하는 윤두준은 내가 보기엔 참, 웃겼다.

“준형이 넌.”
“나 뭐.”
“헤어졌던가?”

아아.

윤두준에 의해 갱신되지 않은 정보가 아직 이기광의 머릿속에 입력되어 있나보다.

“한참 됐는데.”
“그래?”

그래.

나는 고개까지 끄덕여보였고, 이기광은 나를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나란 인간은 뭘 하나 항상 미적지근했다. 누구랑 사귀게 되고 헤어짐에 있어서 매번 싱겁기만 했다. 윤두준과 이기광을 알고 지냈던 기점을 시작으로 하면 총 다섯 명의 여자와 사귀었었고, 마지막엔 내가 항상 차였다. 공부만큼이나 연애도 적당히, 감정도 적당히 나누려 하는 내가 즐거울 여자는 없겠지. 나도 이런 나에게 설득당한지, 이골이 난 지 오래였다.

“넌, 여자 없냐?”
“나?”

이기광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시 한 번 확인을 했다. 나 말야? 하고.

“윤두준 소개 시켜줄 생각 말고.”
“…….”
“너, 하라고.”

‘연애’

강조하듯 툭 끊어 말했지만, 이기광에게 연애라. 생각할 수가 없었다. 이건 확실히 좀 미묘한 감정이다.

“…연애라.”

나지막하게 내가 뱉었던 단어를 읊어보던 녀석이 셀쭉 웃었다. 분명히, 녀석도 나처럼 다 미지근한 거 아닐까, 싶었다. 이기광은 윤두준처럼 내 연애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보였던 적도 없고, 그렇다고 밤마다 외롭다며 나에게 전화해 미친놈소리를 들어야 정신을 차리는 윤두준같은 놈과는 달랐다.
대개, 우리 나이쯤에 관심 갖는 여자에 대한 부분에 항상 초탈한 것처럼 굴 정도로, 이기광은 다른 차원의 녀석이었다. 녀석의 가치관에 관여할 생각은 아니지만, 한 번 물어보고 싶었다. 대략적인 ‘연애관’이라던가, 말 그대로의 ‘연애’라는 걸 어떻게 생각하는 지, 혹은 같잖고 소소한 이상형 따위.






나 도서관인데, 기다려줄 수 있어?
6시 30분. 데리러 간다.

요즘은 윤두준을 걸쳐 자연적인 필터링이 된 이기광이 아니라, 날 것의 새로운 이기광이 나에게 직접적으로 다가왔다. 이를테면, 문자에서 보이는 말투 같은 거라던가.
이따금 아주 사소한 데 생경한 것.
윤두준이 아니면 인간관계가 짧고 작기까지 한 나와 이기광은, 윤두준을 대체할 인물을 우리에게 끌어들이기 보다는, 윤두준 없이 서로를 적극적으로 터득하기 위해 조금씩 노력하는 방안을 동시에 택했다. 서로에게 무심할 때에도 장단이 잘 맞기는 했지만, 지금도 꽤 괜찮았다. 4년의 얄팍한 우정이 있는 힘껏 발휘되는 순간들이다.



“늦었네.”
“달려왔어.”

거짓말. 달리는 거 싫어하잖아.

이기광은 미리 중앙도서관 앞에 나와 있었고, 30분에 데리러간다고 하고서도, 나는 15분이나 늦었다. 손목시계를 확인하는 척 하다가 꽤 정확한 시간관념에 미안하다는 말 대신 녀석의 머리를 한껏 쓸어주었다. 그러면 이기광은 다시 나로 인해 흐트러진 제 머리를 정돈하고, 난 정돈된 녀석의 머리를 흩뜨리길 반복한다.

“죽는다, 너.”

몇 번의 반복 끝에, 녀석이 한껏 귀찮은 말을 내뱉고야 나도 그만두었다.
그동안 사귀어 보았던 여자가 모두 연상이었던 관계로 여자의 머리를 쓸어본다던가 해본 적은 없어 몰랐지만, 최근 습관처럼 만져보았던 이기광의 머리카락에선 매번 좋은 냄새가 나곤 했다. 그래서 우리 집에 있는 샴푸의 향을 확인해 보고 스물 평생 한 번도 직접 사본 적 없는 샴푸를 따로 구입해보기도 했는데, 녀석의 머리카락에서 유독 나는 향기를 내는 샴푸는 아직 찾지를 못했다.
뭘 쓰는 지, 물어볼까 싶다가도 그게 다 그냥 귀찮다.





지하철을 한 시간 정도 타야 집에 가까운 역에 도착이고, 그 새를 못 참아 꾸벅꾸벅 졸던 이기광의 머리가 고스란히 허공을 이리저리 돌았다. 웃겨서 몇 번은 비웃다가 결국 내 어깨로 안착시켰다. 조그만 머리통을 게슴츠레하게 훔쳐보다가 곧 녀석의 힘없는 손아귀에서 떨어뜨려질 것 같은 가방을 내 무릎에 얹어놓았다.
가방을 이렇게 무겁게 들고 다니니까 키가 안 크는 거야 임마.
매번 이기광의 가방을 들어주던 윤두준은 입버릇처럼 그렇게 말했다. 그게 현실로 다가왔다. 내 가방보다 두어 배는 더 무거울 거다.


“이기광, 일어나.”
“…….”

지하철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으면서부터 주체를 못하고 졸음에 빠진 녀석이었다. 오늘 쪽지시험에 리포트 제출 날짜까지 겹쳤다더니만, 당연히 오늘의 하루 일과가 마무리 되면서 쏟아지는 잠을 견딜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한쪽 뺨을 주욱 늘려보았다가, 가볍게 두드려도 보았는데, 세상모르게 꿈나라를 헤맨다.
난 주위의 눈치를 몇 번 보고, 그제야 녀석의 몸을 추슬러보았다. 이기광은 한 번 잠이 들면 거의 시체처럼 늘어지곤 했다. 그래도 매번 그런 이기광을 부축하거나 엎는 건, 윤두준 쪽이었다. 녀석을 둘러매듯 업고 이기광의 가방까지 바리바리 싸들고도 허허거리는 속 좋은 놈이 바로 윤두준이다.

요즘 내가 이기광에게 하는 행동은 대개 다, 윤두준에게서 비롯된 것들이었다.
이기광의 머리를 쓸어준다던지.
졸고 있는 이기광에게 어깨를 빌려준다던지.
그 밖에도 사소한 대부분.
등등등…
…꽤, 수많은 것들.
내가 ‘여자’에게도 잘 해본 적 없는 친절과 ‘남자’에게는 도저히 해 볼 수 없는 무수한 일들을.

윤두준이 이기광에게 행동해 온 것들을 내가 대신 채워주는 정도로, 우리가 근근이 이어오는 관계는 남들이 볼 때 어떤지 몰라도 나는 좀 이상하고 위태롭다는 생각이었다. 우리 둘 중에 한 명이 예전처럼 극도로 소홀해져 버리면 이기광과 나는 그야말로 우정에 의리는커녕 4년 내내 겉만 핥아온 타인이 되어버리는 거다.

인간관계라는 건 늘 그렇듯 좀 어려웠다.
도대체, ‘적당히’라는 상식이 통용되질 않는다.


나는 녀석의 가방을 앞으로 메고 등에는 녀석을 들쳐 업은 채로 느릿느릿 녀석의 집으로 향했다. 그러다가, 골목을 틀어서 녀석의 집과는 전혀 반대방향으로 걸었다. 그냥, 우리 집으로 갈까보다.

윤두준이 언젠가 녀석을 업고는 제 집으로 간 적이 있었다. 그 때 그랬었다. 이기광이 고 1이 되자마자 엄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100일도 지나지 않아 재혼을 하셨단다.
……
나라도, 그런 집구석 싫겠다 싶어서. 녀석을 있는 힘껏 고쳐 업었다.

그러다가 어렴풋이 윤두준을 따라 문상을 간 날, 울지 않던 이기광을 보았던 게 기억이 났다. 생각만 해도 앳된 얼굴이다. 윤두준은 이기광을 보자마자 덥석 안았고, 난 윤두준의 뒤에서 시선이 온전히 맞닿은 녀석을 한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슬퍼 보인 건 윤두준 쪽이었고, 오히려 단단해하게 단련되어 보인 건 이기광이었다.





저녁 늦게, 이기광의 핸드폰으로 윤두준에게서 연락이 왔다.

- 왜 네가 받냐.
“이기광 잔다 지금. 시체 상태.”

받지 말까 생각을 했다가도 안 받는 것도 웃긴가 싶어서 한참을 고민했고, 윤두준은 대번에 핸드폰 주인이 전화를 받은 게 아니라는 걸 알아채었다.

- 거기 어딘데.
“우리 집.”
- 너희 집?

야, 나도 안 가본 너희 집을.

집에, 누굴 데려와 본 건 이기광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부모님도 놀라셨고, 또한 좋아하셨다. 이기광이라면 원래, 그래왔었으니까.

제일 먼저는 이기광을 잘 챙겼느냐 길래, ‘잘 챙김’의 기준을 몰라서 대강 얼버무려버렸다. 안 그래도 녀석이 내 침대에 몸을 구기고 잠들어 있었다. 시간차가 있기는 한데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점점 꽤 불편해 보일만큼 등을 구부리고 자는 게 잠버릇인가 싶었다. 그러다가 꽤 길어진 전화 중에 내일까지 써야할 독후감이 있다는 걸 알고 기염을 토했다. 미리 책을 일주일 전 빌려놓길 다행이지. 그나저나 1학년은 무슨 교양이 이렇게 많은지, 젠장할.


급히 전화를 끊고 습관처럼 안경을 뒤집어 쓴 채 노트북과 서적을 침대로 내던졌다.
침대에 엎드린 채로, 빠르게 학번에 이름을 써넣은 컴퓨터 화면의 문서에는 단 한 톨의 문자도 써넣을 수가 없었다. 부산스럽게 책의 처음을 펴내었고, 깨알 같은 글씨에 신경이 곤두섰다.

책장을 대강 훑고 넘기고를 반복하는 것과 비슷하게, 옆에 구부리고 누운 이기광이 반복적으로 부딪혀왔다. 처음에는 손가락이 닿고 팔이 둘러지고 어깨가 부딪히더니 몸이 안겼다. 어깨 아래로 어지럽게 닿은 녀석의 머릿결을 쓸어보다가 문득 또 내가 궁금했던 그 향이 나는 걸 느끼고 몇 번 코를 벌름거려보았다.
아, 모르겠다, 역시.
그래도 참 좋은 냄새다.

“…….”

녀석의 다리 하나가 허리 쪽으로 감기자, 그제야 잠버릇 한 번 후지다 싶어, 이기광의 이마 정중앙에 손가락을 튕겨내었다. 그제야, 녀석은 잠이 좀 깼는지, 양 미간이 잔뜩 찌푸린다.

“두준아, 물 좀.”

너 줄 물 없어, 임마. 하고 얼굴을 뭉갰더니 잠결에 금방 찡얼거린다. 나 물. 물 좀.


새벽이 다 와가는 시간이라 거실이 컴컴했다. 물 한 컵 부엌에서 따라다가, 방에 들어갔더니 이기광이 허리를 세우고 앉아서 내가 방금 전 까지 읽고 있던 책을 대강 빠르게 넘겨보고 있었다.

“야, 물.”
“어. 준형이네.”

그래, 윤두준 아니고.

잠결에 내뱉어 경황이 없는 말이었을 줄로 알지만, 난 가볍게 정정해주었다. 이기광이 물 컵을 받아들자마자, 나는 잔뜩 몸을 침대에 누이고 노트북을 가슴께에 올려놓았다.

“리포트?”
“어. 내일까지래. 읽지도 않았어.”
“망했네.”

망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는데, 녀석의 입에서 나오고 나니 제 처지가 한심해 곧 한숨이 쏟아졌다.
어쨌든, 나는 녀석이 든 책을 받으려고 손을 건넸고, 책 대신 녀석이 내게 바짝 붙어 누웠다. 뒷머리가 잔뜩 뻗혀 제가 우스꽝스럽다는 것을 알까, 싶었는데, 그런 이기광이 속없이 말갛게 웃었다.

“물 값, 침대 빌린 값은 해야지.”
“…….”

나 이 책 읽었어. 도와줄게.

난 속으로 백 번이고, 쾌재를 불렀다.





_







그래도 두 시간을 채 못 잤고, 수도 없는 핸드폰 진동에 겨우 잠을 깰 수가 있었다. 내 옆에 있어야할 이기광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채였고, 다만 죽어라 울리는 핸드폰에는 이기광의 번호가 떠 있었다. 그렇게 겨우 강의에 늦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이기광의 덕이었다. 게다가 리포트에 마침표를 찍고 까무룩 잠이 들었던 것 같은데, 아침에 부랴부랴 리포트를 다시 확인해 보니 철자나 문자, 문체 등 꽤 유연하고 말쑥한 리포트가 완성되어 있었다.
학교를 향해 가는 지하철을 함께 탄 이기광은 새벽에 좀처럼 잠을 못 이룬 것 치곤 꽤 피곤하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가 잠이 든 걸 확인한 후에 그냥 집으로 획 가버렸단다. 잔뜩 뻗혔던 녀석의 뒷머리까지도 말끔히 잘 정돈되어진 상태였다. 샴푸는 또 그 향을 썼으려나, 싶은 게- 온통 내 머리 속을 지배한다. 정말 나란 놈도 쓸데없는 것들이 다 궁금하지 싶다.

“전화 안 했으면 큰일 날 뻔 했네.”
“어.”

야, 고맙다.

졸린 눈을 비비적대던 것처럼, 녀석의 가지런한 머리를 흩뜨렸더니 기회를 놓치질 않는다.

“고마우면, 아이스 라떼.”

덧붙일 것도 없이 흔쾌하게 수긍했다.
고마운 게 모닝콜 뿐만은 아니라서.





윤두준은 수업에 늦고, 리포트도 내지 못한 것에 개의치도 않았다. 수업이 다 끝나자마자, 내 자리까지 쫒아와 책상 위의 얼음이 거의 다 녹은 아이스 라떼를 벌컥벌컥 들이킨다. 그리고 컵에 자잘한 얼음만 남을 정도로 싸그리 먹어치우고는 잔뜩 미간을 좁혀 야, 시럽 안 넣었냐. 하고 바보 같은 말을 했다.

“리포트 했어?”
“어.”
“뭐야, 못 할 것처럼 굴더니.”

이기광이.

내가 한 게 아니라 이기광이 한 게 확실해서, 비죽 웃었더니 그러냐, 하고 심드렁한 말투를 했다.

“장족의 발전이다, 너희.”

어제 너희 집에 같이 있다고 하질 않나.
……
리포트를 써주질 않나.

짝짝짝, 박수 세 번을 유쾌하게 치며 리액션까지 요란하다. 뭐든 잔뜩 가열 찬 게 윤두준이다. 연애도 그래서 이렇게 이기광과 날 등한시하고 열심을 내나보다. 아무래도 정말 유별난 녀석이다.
컵 속의 얼음까지 잔뜩 입에 넣던 윤두준이 꽤 차가움을 못 이기는 얼굴을 했다. 쌤통이다 싶어 비죽 웃었다.

“그나저나, 이기광이 커피를 다 마시더라.”

텅 빈 플라스틱 컵을 강의실에서 꽤 떨어진 구석에 있는 쓰레기통에 넣어보겠다며 시늉을 한 녀석이 주절주절 제 말을 내뱉었다.

“걔, 커피 안마시잖아.”

……

악, 하고 윤두준이 비명을 내었고 멀리, 쓰레기통에 빗맞은 컵은 쓰레기통 주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요새 너랑 같이 다니더니,”
“…….”
“커피 중독인 너한테 옮았나.”

……
……

이건, 몰랐다. 녀석이 커피를 먹지 않는 줄은.
…젠장.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피곤할 걸 알아서, 일부러 이기광이 제가 먹고 싶은 척, 커피를 사달라고 조른 걸.

고등학교 때는 그랬다. 나야 제 3자의 입장에서 보는 거라 더 잘 보였는지 몰라도, 겉으로는 윤두준이 이기광을 감싸고돈다거나 잘 챙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내를 잘 들여다보면 오히려 이기광이 윤두준을 도리어 교묘하게 챙겨 들곤 했다.
윤두준은 매사에 이기광의 챙김을 받고 있었다는 걸 알고나 있을까.
지금 내가 늦게야, 녀석의 엉큼한 호의를 깨달은 것처럼.



커피, 고맙다.
뭐야, 네가 산거잖아. 잊어버렸어?

연강이 시작되려는 차에 뒤늦게 이기광에게 문자를 했더니, 금방 돌아온 답장이 저렇다.
가볍게 비식, 웃어버렸다.

돈은 내가 냈을지 몰라도.
마음은 이기광이 먼저 낸 거다.








to be continued

심심한 거, 너무 써보고 싶었음.
재미는 개나 주고, 어쨌든, 일단은 또 이렇게, 시시시작.

 
인간관계에 적당함이 통용되지 않는다는 말에 공감했어요-
새 소설도 담백하면서도 맛깔나서 좋아요- 대사 하나하나가 와닿는 것도! ^^
 
심심한 거, 아니잖아요. 프흐흐. 묘하게 달큰해서 좋은데요, 왜. :)
용준형이라면 정말로 인간관계가 저럴 것 같다는 생각에, 웃어버렸어요. 그 누군가가 챙겨주지 않으면 스스로 챙기지 않을 법한 녀석이라서.
 
아으..이거 너무 달달한데요. 입가에 웃음이 둥둥 떠서 가시지를 않네요 하하. 이렇게 새 글이 시작되는군요. 저 세 사람의 등장이 참 좋고 왠지 저까지 행복해지는 기분이에요.
 
이런 소소한 연애같은 둘의 관계 좋아요. 뭔가, 연애초보들이 연애를 막 시작한 것 같은 그런 거? 와, 달달하다, 이런 느낌은 아닌데, 혀끝부터 서서히 달큰해지는 것 같은. 형광은 이런 맛인가봐요< 용준형의 성격도 은근히 챙기는 이기광의 세심함도 간질간질하고 좋아요:-)
 
엄마.. 마음은 이기광이 먼저 냈대.. 은근 반전인데요?ㅋ 열정적으로 챙기고 든 건 두준인데, 은근슬쩍, 응큼하게- 두준이고 준형이고 챙긴 건 기광이고. 그래서 심심하지 않아요, 잔잔하게 재미가 있어요. =]
 
이런 묘한 관계, 심심하다기보단 담백하고 재밌는데요. 소소한 에피소드를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으면 마음이 들여다 보일 것만 같은 두 녀석인 걸요! 은근하게 전해지는 마음이 어떨지, 기대, 기대:)
delete
오오오잔잔하니 정말 평범한 연애를 곧시작할 것같은데요.기대하고 있어요!!
 
핫 브로 속의 광이는 항상 챙김을 받아야 할 것 같은 아이인데
그래두 마음은 남을 먼저 생각하는 전형적인 에이형 쿄쿄
 
느슨해보이지만, 어쩌면 서로 팽팽하게 잡아당기고 있을 지도 모르는 끈이 보이는 것 같아요. 언제나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편안함 속에서 꼭 밀물 듯이 감정이 들어차서, 언제 감동 받나 싶게 마음이 꽉 차요. 나도 그런 글을 쓰고 싶다, 항상 느끼지만. 뭐:)

제 속도가 느려서 죄송할 뿐이고, 한참 모자라서 더 죄송하고 그래요. 그래도, 형광이들. 예쁘니까. 예뻐하는 마음 하나면 되겠지, 싶고 또. 헷

2편 화이팅이에요. 기다릴게요=]
 
예상치 못한 순간에 사랑이 찾아온다는 말, 준형이를 보며 한번 더 깨닫네요. ㅜㅜ
 
이런 분위기의 글 너무 좋아해요!!!
잔잔하고 평온한 분위기인데 막 두근두근거리네요.
 
아 정말 기대되요ㅠㅠ푸리에님의 글은 진짜 잔잔한게 매력인거같애요 :)
 
이걸왜 이제서야읽었을까요ㅠ 둘이 뭔가 시작될것같은느낌! 간질거려요ㅎㅎ
 
너무 좋아요, 푸리에님 글은 너무 현실적인 것 같아요. 그래서 더 읽기 쉽고, 재밌고 가깝네요. 고맙습니다, 이런 글 써주셔서!
 
기광이는 참 저런 배려심이 있는 아이로 표현 되는게.어찌 저렇게.잘 어울릴까요?? ^^
 
이 글을 어찌나 읽고싶던지요 이렇게 읽게 되서 너무 좋아요
name pass
list  
Copyright 1999-2018 Zeroboard